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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한복음 11장 1 ~ 4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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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본문은 흔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구절이다. 이런 간결한 제목은 물론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가 사랑했던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병, 죽음, 장사, 부패, 무덤에서 걸어 나옴 등이 이 이야기의 중요 요소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나사로라는 한 개인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받았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1)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구원이라는 경이로운 주제, (2) 그 일을 행하신 분, (3) 그 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

 이 세 가지 초점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명확하고 단일한 신학적 관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복음서 전체가 부활절 이후 신앙(post-Easter faith)의 관점에서 서술되었지만, 요한은 부활 신앙을 예수의 사역의 이야기 속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예수의 신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요한복음의 핵심적 신앙고백,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이 예수의 인성을 덜 생생하게 기술한다고, 혹은 요한의 기독론이 성육신을 가장 진실되게 기술한다고 칭송(혹은 비판)해 왔다. 이와 비슷하게,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가 어떤 분이고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에 관한 진리가, 최초의 오해 단계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사건을 통해 점차 드러나, 마지막에야 완전히 드러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은 모든 진리가 예수의 생애 가운데 즉시 드러나는 것으로 묘사한다.(역설과 언어적 유희와 몰이해와 예수의 설명을 통한 깨달음 등의 방식을 통하여)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그 기적이 정말 일어났는가이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자들 사이에서 기적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요한복음은 이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본문의 위치를 고려해볼 때, 이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뜻으로 소개된 것이 명백하다. 이 사건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해 있느냐는 질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의 사역에서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되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비판적인 탐구 정신과 검증에 근거한 과학적 사고의 관점을 고려해 볼 때 기적(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을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는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요한복음이 이러한 논쟁에 공헌한 것이 있다면 기적을 징표(Sing)로 보는 방식이다. 나사로를 일으키신 일은, 요한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가 행한 징표 중 가장 절정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예수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한 것으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예수와 함께함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낸다. 이런 징표는 목도(目睹)한 이에게 경이로운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증거가 된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의 영화에 관한 믿음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영광”이나 “영화”라는 용어는 들어 올림(lifted up),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십자가에 들어 올리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나사로의 부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이 지금 이곳에서 (나사로가 겪었던 병, 죽음, 매장 등의 일상사 속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을 포함한 모든 징표는 예수를 가리키고, 예수는 다시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임을 보여주셨다. 생명을 주는 예수의 행동은 마리아나 마르나, 나사로, 혹은 구경꾼의 믿음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한다. 여기에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인식한다는 요한의 또 다른 주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나사로는 예수의 말씀에 무덤으로부터 나왔고,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이 중요한 징표적 사건에 앞서서 예수의 “나는...” 말씀의 최고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소개된다.(25이 말씀은 마르다 및 마리아와 나눈 대화 속에 포함되어 있다이 둘은 모두 믿음이 있었지만각자의 다른 관점에서 예수가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37앞서 예수가 나사로의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죽게된 것을 알렸지만일부러 지체했다는 사실(5)은 이들의 하소연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그러나 이런 배경은 요한의 신학적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나게 하는 무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였다요한의 신학적 요점은 이것이다살아서 부활이요 생명인 분을 믿는 자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이 생명은 장래에 올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General Resurrection)에 관한 믿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마르다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것처럼한 구체적 개인의 믿음과 관련된다“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27그리고 나사로가 일어나는 사건이 생겼다종말이 현재 속에서 실현된 것이다.

  오늘 본문은 많은 신학적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부활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은유가 꼭 필요한가? 마르다의 고백에 나오는 믿음의 내용은 어떤 사실이나 대상이 아니고 예수였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다의 고백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신앙고백 시리즈 중의 하나인데, 그 최종적인 고백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20:28)

 요한복음 결론부에 등장하는 도마의 고백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고 믿는”(seeing and believing)것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은 하나의 징표로서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다. 예수가 한 일을 보고, 마리아와 함께 온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도 각성되었다. 도마에게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살아나신 예수를 보는 것이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징표를 보는 것에 관해 최종적인 예수의 말씀은 이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20:29) 그렇다면, 믿음은 보이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학자와 설교자가 씨름해야 할 도전적인 주제이다.

 

주석적 관점

 

일곱 가지 표적 중에서 마지막표적으로서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부활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의 전환점이 된다. 요한복음에만 있는 본문으로 이 이야기는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과 예수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연관된 사건(확장된 담론)을 공생애와 연결시키는 가교역할을 한다. 이 복음서의 많은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반복해서 예수가 누구인가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는 그의 능력을 믿는 행동(요한복음에서는 언제나 동사, 믿음이라는 명사는 사용안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야기 차원에서는 일곱 번째 표적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첫째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45), 한편으로는 예수와 공의회와 갈등을 가속화했다(47-53).

비록 이 본문이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온 설화적 묘사이지만, 많은 용어들이 요한복음 서문과 연관시키고 있다:하나님/예수의 영광(4 비교1:14);(9 비교1:4-9);생명(25 비교1:4); 믿는 것(15,26-27,40,42,45 비고1:12);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27 비고1:9). 여러 가지 수식어나 수식구들도 요한의 것과 비슷하다: “내가.,이다.(25); 사랑(agape;phileo3,5);마지막 날의 부활(24);왔다가 하신일 보고 믿게 되었다(45). 또한 이 사건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많은 사람에게 예수의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의 거울이 된다. 이야기 앞과 뒤 동시에 지적하는 것으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복음서의 많은 근본적인 주제들을 형상화한다.

두 가지 예수에 대한 반응-믿음과 갈등-이 이야기의 프레임을 구성하고 있다첫 번째 프레임에서는나사로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예수는 봉헌절에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거기서 그가 그리스도인지를 밝히도록 강요했다예수의 대응에 분노하여 그들은 돌을 들어 치려하며 “사람으로서 감히 하나님이라고 한다”(10:22-33)고 고발했다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 건너 쪽으로 피했는데거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10:42). 같은 두 가지 반응이 두 번째 프레임 즉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킨 후에 일어났다“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지만그 가운데 몇 몇 사람은 예수가 나라에 위협이 된다고 걱정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알렸다그들은 서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였다(11:45-53).

한편 나사로는 자신이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부활은 예수의 명성을 자자하게 만들었는데, 얼마 뒤에 베다니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 많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 모였다(12:1-9). 이 사람들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도 계속해서 예수와 나사로 이야기를 했기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행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에 심각한 우려를 갖게 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사역을 금지하도록 결정했고, 나사로가 많은 사람들을 예수를 믿게 하므로(12:10-11,17) 그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분명히 부활과 생명이 되신 사람에 의해 생명을 구한 사람이 죽을 처지가 되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에 많은 사람들이 관여되었지만, 두 자매를 강조해서 본다. 그 자매들은 복음서가 씌여진 본래의 공동체에 알려진 사람들이다. 나사로는 다른 방법이 아닌 그 자매들과의 관계로 소개되었다.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마을인 베다니 사람이다(11:1). 인물의 정체성을 조율하기 위해 저자는 나사로가 마리아의 오라버니라고 했고,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나중에 편집되었을 터인데, 마리아는 머리털로 주님의 발에 기름부음으로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사건이 이야기 식으로 일어나진 않았는데, 하지만 그러한 일의 발생은 그를 믿거나 믿지 않는 기회(12:1-11)로서 예수의 일곱 번째 표적의 중요성을 재강조한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와 각자 소통하지만 여기에서는 같은 말을 한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32). 이 언급이 신앙의 고백인지 원망인지 헷갈리는데,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예수가 생명을 가져오는 분이라는 반복되는 주장을 보여준다.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예수는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라고 물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아라”고 명령하고, 예수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43)하고 외쳤는데, 그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어둠 속에 있다가 살아났다.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으로 죽음을 이긴 것이다. 하지만 손발은 천으로 감겨있고, 얼굴을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는 것은 죽음이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날, 다른 마리아는 다른 무덤에서 울면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개 말해 주세요.(20:15). 그날에 장사지낸 옷은 무덤에 두었고 얼굴을 싸맨 수건은 개켜 놓았는데 더 이상 하나님이 일으킨 사람에게 필요 없는 것이다. 그날에 제자들도 나사로를 살리신 것보다 더 위대한 표적을 보았다. 여기, 나사로의 무덤에서 죽음이 당분간 거부된다. 거기, 예수의 무덤에서 선을 위해 죽음을 이겼다.

 

목회적 관점

 

부활의 희망과 죽음이라는 종말 사이의 긴장감은 개인과 공동체가 집중적으로 반성하는 계절(사순절-역자 주) 동안 선명해진다. 고통스러운 상황과 죽음을 부르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우리는 부활과, 한계를 넘어 꿈을 꾸도록 우리를 해방시키는 자유와,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한계를 넘어 꿈을 꾼다는 것은 온전함, 복지, 건강, 번영이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인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어서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세상이 그래야 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사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회종교적 구속을 거부해야 한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의 말씀은 우리 존재의 현재성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과 공동체의 삶에서 부활의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가능성을 상상할 때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지각(知覺)을 왜곡하는 것이다. 장애물은 본래의 모습보다 크고 불길해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 있게 대안을 찾기보다 위험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오늘의 성서본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자들은 예수가 사역하는 내내 예수의 동반자였으며 한 마을, 도시, 산악 지방에서 다른 곳으로 그와 함께 여행했지만 부활과 생명의 회복 가능성보다는 상황에 따른 한계에 더 관심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관심은 종종 지난 주 말씀에서 시각장애인을 만났을 때 예수의 치유하는 능력보다 시각장애인의 상태의 기원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예수의 사역의 초점과 상반되는 목적을 가진다.

나사로의 병과 그에 따른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이틀 후에 다시 유대 지방으로 위험한 여행을 하기로 한 예수의 결정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들은 며칠 전 돌에 맞아 죽을 뻔 하다 겨우 빠져나온 것을 상기하면서 유대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더욱이, 예수 자신의 말처럼,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나사로의 병과 그에 따른 죽음에 대한 계시적인 가능성을 강조하고 제자들에게 여행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키면서 여행을 고집한다. 도마와 다른 제자들은 완전히 확신하지는 않았지만-“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16)-부활의 가능성에 흥미를 느끼며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난다.

예수와 제자들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가까워지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긴장이 심화되고 슬픔이 압도한다. 나사로의 죽음과 마지막 잠든 모습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가족과 친구들의 울음과 애통이 분위기를 가득 채운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영혼의 여정은 이미 끝났다. 그의 영혼은 더 이상 몸 근처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나사로는 확실히 죽었다.

최종적인 죽음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을 깊게 했고, 예수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망감을 깊게 한다 -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1).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친구로 여겼고, 하나님은 예수의 요청을 존중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만약 예수가 좀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그들은 그를 교사, 치유자,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믿으며 그가 메시아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의 부활을 예상하고 그들의 형제 나사로와 다시 연합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하는 예수의 정체성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예수는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의 의심을 내버려둔 채, 그러나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기대하도록, 부활을 현재의 현실로 말한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우리가 마리아와 마르다와 그들의 지역 사회를 멀리서 관찰할 때우리도 부활의 가능성에 흥미를 느끼고 무덤에서 그들과 합류해야 한다고 느낀다우리는 예수의 눈물이 사랑이나 후회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크게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우리는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지시하는 예수의 음성이 전과는 달라진 것을 듣는다우리는 동일한 사건에서 깊은 신앙과 약하게 만드는 의심이 합쳐지면서 예상되는 긴장감을 느낀다우리는 결론을 알지만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나사로야나오너라!(43)라고 하는 선포는 무덤 전체에 울려 퍼져서생명이 없는 나사로의 몸을 깨어나게 해서 생명을 되살아나게 하는 부름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출생, , 죽음, 부활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전례 전통으로 형상화 된 부활의 권능을 믿는다. 부활과 생명은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소명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기 위한 핵심이다. 이 점에서 부활은 긴급한 부르심으로 우리와 마주서며, 우리의 세계가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죽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새로운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전쟁, 집단 학살, 빈곤, 질병, 불쾌감, 체계적인 학대, 조직적 억압이라는 수의에 묶인 사람들과 공동체의 삶에서 부활의 능력을 위해 기도한다.

나사로가 그의 공동체를 부활시킨 것처럼, 죽음의 손아귀에서 사람과 공동체를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지만, 살아있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라”고 요구하셨다. 오늘날 부활한 여자들, 남자들,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이 혼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불신, 사회적 고립, 주변화 및 억압이라는 수의를 벗어던질 때까지, 두려움, 근심, 상실, 슬픔이라는 포장을 찢어버릴 때까지 그들을 양육하고 강해지도록 돌보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유로워진 여성, 남성 및 어린이들이 세상에서 존엄하게 걸으며 창조적인 행위자가 되게 해야 한다.

몇 년 전, 친구가 “가능성을 생각하라….”는 슬로건을 쓴 포스터를 주었다.-여기서 줄임표는 더 많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 슬로건은 우리에게 한계를 넘어서 꿈꾸며, 부활의 가능성을 고려하라고 도발적으로 상기시킨다. 그것이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의 무덤에 서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풀어주려는 마음을 심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진정으로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증거하면서도, 공관복음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를 이 세상에 전혀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 (not quite grounded) 분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을 반박하는 것이 바로 친구 나사로의 시신 앞에서 우는 예수의 모습이다. 이 장면은 성육신 그 자체가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고 또 친구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우정을 안타까워하는 우리들 인간의 모습을 예수께서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우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지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여기에서 사용된 “사랑하다”라는 헬라어는 아가페(agape,요한문서들이 애용하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동사형이 아니다예수께서 친구 나사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은 필리아 (philia)인데 이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헬라어로 친구들을 향한 일반 사람들의 사랑을 뜻하는 “우정”(friendship) “인간적 애정”(human affection) 혹은 “깊은 감정”(deep feeling)을 말한다몇 장 뒤의 요한복음 15:13-15에서예수께서 제자들을 종의 신분에서 친구로 격상시키는데 바로 그 지위를 뜻한다초기 미국 작곡가 윌리엄 빌링스 (William Billings)의 “예수께서 우셨을 때” (When Jesus Wept)는 바로 이 본문을 바탕으로 합창이나 제창으로 부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예수께서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시는 모습이 오늘 복음서 이야기의 감성적인 핵심이지만, 설교적 포인트는 특히 다음 주 종려주일(혹은 고난주일) 그리고 고난주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 그 다음 구절에 있다. 이상하게도 이 구절들 곧 요한의 고난이야기의 핵심적 구성요소가 3년주기의 개정성서정과 (Revised Common Lectionary)본문에는 빠져있다. 왜냐하면 [빠진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서 죽은 친구를 소생(resuscitation)시킨 일은 예수 자신의 부활 (resurrection)을 보여주는 은유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 읽은 본문 다음의 구절들은 이렇게 보도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 11:46-50, 53, 새번역)  

-여기서 다시 NRSV는 가야바의 충고를 “그것이 더 나으니”(it is better, 50, it=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전체가 망하지 않는 일)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나는 더 오래된 RSV의 번역 “그것이 편리하니” (it is expedient)가 보다 정치적 의미를 담고있어서 그 번역을 좋아한다. 이 본문은[오늘 본문 그 다음]  예수를 죽이자고 가야바를 추동한 것이 로마가 그 자신-그리고 그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빗나간 애국적, 민족종교적 연대임을 즉 정치적 편의 (political expediency)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계획은 현상유지를 위협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편리한 (간편한-convenient, 그리고 유용한-useful이라는 뜻을 지닌),방법이라는 동의상황에서 결의된 것이다. 교회와 국가는 죄없는 자의 그 죽음을 방조한다. 누가복음은 예수를 빌라도 법정에 서게 만든 혐의를 이렇게 나이스하게 요약한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 23:2, RSV. 한글번역은 새번역)  

-가야바는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여 죽는 것이 “편리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가르친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방조하는 가야바가 자기는 알지 못한 채 예언을 하고 있다고 (51) 즉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어야만 하는 일이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하고 미리 말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 후에 교회의 속죄신학 (theology of atonement)으로 (여기서는 아직 대속적 이론,substitutionary theories,으로 한정되지는 않고있고)으로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자기 희생 (self-sacrifice)으로 인해, 그 나라 혹은 유대민족 심지어 모든 믿는 자들 뿐만 아니라 전 우주, 모든 피조물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자는 동의를 이끌어 내면서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몰랐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죄없는 자의 죽음을 만든 악을 복음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창의적이다. 

이런 음모를 꾸민 사람들이 성금요일에 그 결과를 얻게 되는 예수이야기 구성은 오늘 한 친구의 죽음을 두고 울고있는 예수에게서 시작된다부활절은 진실한 그리고 예상하지 않은 결과를 보여줄 것인데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가 예수만이 아니라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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