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이 글에서 필자는 본문의 병든 여자가 오늘날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해석하고,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병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인적인 목회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18년 동안 영혼이 부자유했던 이 여자는 신체도 부자유하여 똑바로 설 수 없었다. 이 여자는 낫게 해 달라고 먼저 요청하지 않았다. 예수가 먼저 이 여자를 불러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병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했다. 이 여자의 반응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 여자가 고쳐달라고 청하지 않았고 주위의 누구도 이 여자를 고쳐달라고 예수께 부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18년 동안 이 익명의 여인은 해나 하늘이나 별을 보려면 온몸을 비틀어야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여자는 사탄이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는 자신의 장기적 중병에 대해 익숙해졌을 것이다. 18년 동안 이 여자는 아래만 보는 것, 혹은 기껏해야 몇 발자국 앞만 보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어 위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18년 동안 이 여자는 다른 사람들은 힐끗 눈길을 한번 주면 파악할 수 있는 세상을 보기 위해 왼쪽과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반복적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이 여자는 이런 방식에 익숙해졌고 누구도 이 여자가 처한 운명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회당장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본문에서 종종 회당장의 잘못된 태도가 주목을 받는다. 설교자는 인간사에서 매우 자주 보게 되는 이런 반응에 초점을 맞추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가 두 비유, 즉 <회개를 강조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13:1-9)>와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고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할 때 겪게 되는 절망의 문제를 다룬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13:18-21)> 사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 치유에 관한 이야기가 겨자씨(회개의 촉구)나 누룩(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같이 우리가 맘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에 관한 비유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경이로운 측면과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으로 침투하는 측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익명의 여인을 통해 치유적 목회와 예언적 목회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치유가 목회적이고 예언적인 측면과 관계있다는 점을 자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는 영적, 사회적 해방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를 제한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다짐을 할 것이고, 또한 우리가 목표에 완전히 이르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사역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과 가능성을 더 잘 보게 될 것이다.
치유에 관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의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각 영역 속에 있는 은총, 소망, 심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우리가 굳이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증언과 그 증언의 방향을 평가·재평가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길인지, 교회의 길인지, 인간의 어리석은 길인지, 혹은 허영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욱 건강하고 치유력을 가진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힘과 결단력을 갖게 될 것이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치유가 목회적이고 예언자적인 측면이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구원을 향한 길은 하나이고, 이 모든 측면이 여기에 포함된다. 치유와 죄 사이에는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나 다른 것들로부터 (죄로부터) 피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회당장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을 지적하면서, 설교자는 위로자이며 동시에 희망의 선포가가 된다.
우리는 회중과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것을 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가 선한 동기로 시작했지만 위선적인 종교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다면 공동체를 양육하고 격려하여야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 삶에 성령과 소망의 형태로 오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통한다. 이것은 행하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꼭 우리의 삶 속에서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등이 굽어서 일어나 해를 보지 못하는 여자와 같은 신세이다. 우리는 발아래 흙과 먼지만 볼 뿐이다. 우리는 똑바로 설 수 없어서 앞을 보려면 온몸을 비틀면서 어렵게 바라보아야 한다. 고쳐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예수의 초대에 한 발자국 가까이 가는 방법이다. 예수는 우리가 이 세상을 고치려고 하듯이 우리 영혼도 고치려고 노력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치유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등이 굽은 여자를 치유한 은사를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이 여자는 치유함을 받고 허리를 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주석적 관점
- 만약 우리가 누가복음 전반부 12장을 읽었고, 그 중 다양한 상황에서 예수가 안식일에 치유한 것과 안식일법을 재정립하려했던 것을 보았다면, 오늘 본문의 사건도 친근하게 느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일”(6:5)이라고 선언하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착한 일을 하는 것”(6:9)임을 확신했기에, 우리는 여기에서의 예수의 행동이나 가르침을 보고 전혀 놀라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청중들은 예수를 이상하게 여긴다. 예수가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18년 동안이나 “약한 영혼을 가진”(필자사역) 이름 모를 여인이 나타난다. 그 여인을 보면서 예수는 결정해야만 했다. 그 여인을 고치고 안식일에 관한 구전법을 어길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에 제한된 것을 지키고 여인에게 필요한 축복을 주지 않을 것인가. 이사야 61:1의 해방적 비전에서 나온 4:18-21의 그의 사명에 대한 이해를 고려한다면 그의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비록 그 여인이 요청하지 않았다 해도 예수는 반드시 그녀를 고쳐주었을 것이다.
- 누가는 치유 이적을 두 단계로 묘사한다. 우선 예수는 13:12에서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하신다. 그런데 치유가 13절에 나오는 예수가 손을 얹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불필요한 두 단계를 거치는 것이 6:6-11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 것과, 4:31-37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안식일 치유 이야기와 구별된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14:1-6의 수종병 앓는 사람을 고친 이야기와 비슷한데, 하지만 여기에서의 손을 얹음은 다른 목적이 있다.
- 이 본문에서 예수는 자주 그러하듯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대항한다. 6:7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나 14:3의 “율법교사들이나 바라새인들”과 같이 이러한 치유이야기에는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사람들”(6:7)이나 예수의 행동에 반대하여 “잠잠해진”(14:4) 사람들과 같은 적대자들이 등장한다. 이 절에서는 분개한 회당장이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에 대해 논박한다(13:1).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의 치유가 뒤집어 놓을 현상유지를 대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구조를 강화하는 구전 전통의 문을 지키는 수호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선을 행하는”것이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같이 선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사회질서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 안식일 준수를 유지하려는 것은 다른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에 있어 결정적이다. 미국 남부의 노예옹호제도(slavocracy)들은 부분적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려는 것에 대한 제한을 통해 유지되었다. 노예제도를 유지한 남부의 종교적 관행들에 대해 성찰하면서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 미카엘교회의 종교적 지도자에게는 우리들이(노예들이) 안식일에 레슬링, 복싱, 위스키 마시는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배우려는 것이 생소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러한 저질의 스포츠에 빠져, 지성적이고, 도덕적이고 책임적인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노예가 된 아프리카 흑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자신들을 교육하기를 원해도, 문자적으로 “선을 행하려”해도, 그들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보는 자신들의 삶을 규정짓는 사회시스템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대농장이라는 배경이 분명히 예수가 접했던 상황과는 달랐지만, 권력 통제 질서라는 이슈는 두 경우 모두 비슷했다. 두 경우에 있어서의 안식일 규례의 통제는 억압적 체제를 유지하는 간편한 방법을 보여 준다. 그 체제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악화시키는 짐을 경감시키는 것보다는 그러한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데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영원한 고통을 견디도록 강요받는다.
- 예수의 행동은 13:15-16의 말을 행함으로 그러한 체제에 도전한다. 예수는 후기 랍비 유대주의가 많이 사용하는 추론의 패턴을 차용하여,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조셉 피츠마이어(Joseph Fitzmyer)가 말한 a minori ad maius의[“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라는 뜻] 수사학적 패턴으로 논쟁한다. 만약에 소나 나귀를 안식일에 플어 주는 것이 허용된다면, 왜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던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가 말인가? 예수에게는 인간에 대한 돌봄 자체가 종교적 덕목이고, 이는 종교가 장려하는 의식, 예식, 사회적 체제에 우선하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안식일에 대한 구약성경의 개념에서 강조하고 있는 한 가지는 이스라엘이 모든 일에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휴식의 거룩한 날로 왕관을 씌워주시기 때문이다(창 2:2-3).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주시고 신성하게 하기 위하여 창조의 사역으로부터 쉬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출 20:8-11).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는 구약성경의 이러한 개념을 보완하는 다른 강조를 선택하는데(신 5:12-15), 거기서는 안식일 계명이 언약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인정해서 그날을 지키고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안식일을 준수하고 거룩하게 행하라는 두 번째 강조에서 백성들은 거룩한 사역을 시작한다. 완전한 쉼과 적극적인 안식일 실천은 일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적극적인 거룩함이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미쉬나에서 인정하는 대로 소의 주인이 안식일에 자기 소들을 짐을 지우지 않고 물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서 일로부터 쉬는 것과 안식일의 거룩함을 지키고 유지하는 활동을 하는 것 양쪽 모두가 가진 공적인 기능은 율법에 제도적이고 공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하나님만을 홀로 영화롭게 하고 예배하며 이웃에게 정의롭게 한다. 거룩에 대한 신명기적인 이해는 구약성경 예언 전승의 핵심이다.
안식일에 성전에 있던 지체장애인 여성을 설명하면서 누가는 안식일에 대한 두 번째 이해, 즉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일하는 것에 대한 지키기 힘든 요구를 통해 오랫동안 사람들을 속박해서 통제해왔는데, 예수가 한 일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해방된 것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종교 의식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손에서 사회적인 통제와 억압의 수단이 되었다. 속박하는 영은 여성의 안에 살아 있어서 독립과 자유를 제한해서 그녀를 강하고 충만하게 살지 못하게 한다.
C.S.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오는, 버스 한 대에 타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휴가 온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그녀가 죽기 전에 Golder’s Green에 살던 세탁부였다. 그녀는 적은 급료로 그녀를 고용한 사람들의 옷의 얼룩에서 그녀의 생계를 짜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새로운 날의 빛나는 광채 속에서 웃으면서, 귀부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그녀 자신이 하얀 가운을 입고 보석 머리장식을 했다. 버스를 타고 지옥을 떠나 천국으로 휴가를 온 사람들 대부분은, 천국에 머무는 대신 지옥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되돌아가는 여정은 힘들다. 왜냐하면 지옥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하나님 나라의 광대한 초원에 있는 작은 틈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작아져서 여행객을 찌부러뜨리는 마차를 타고, 거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아질 때까지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좁고 갑갑한 곳으로 들어가서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장애인 여성은, 그러나, 휴가를 계속하기로 했다.
갈릴리에서, 열두 명의 남성 제자들이 예수와 동행하였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막달라와…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눅 8:2-3).”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와 남성 제자들을 섬겼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동행하고 남성 제자들에게 증언한 사람들도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다른 여성들이었다. 오늘의 성서정과는 18년 동안 구속되어 온 여인이 아브라함이 사라와 함께 맺은 언약의 딸이고, 생명을 주고 자유를 주는 예수의 터치로 억압과 육체적 질병에서 해방을 받은 다른 많은 아브라함의 딸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수가 속박의 영을 쫓아낸 것과 여인의 관절이 비틀어진 것을 고쳐주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다. 안식일에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생색을 내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들의 짐을 무시하는 것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망신을 당했다. 새로운 치유를 목격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가 한 놀라운 일들을 기뻐했다. 하나님의 참된 안식일은 예수의 터치로 자유를 찾은 이름 없는 여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유와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의 실천과 가르침에서 안식일의 목회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워진 억누르는 짐을 통해 세상에서 작용하는 속박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복하는 하나님의 해방하시는 능력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포함한다. 이 이름 없는 여인은 악마의 억압과 질병이라는 무거운 짐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충만한 삶을 강탈하는 다른 어떤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하는 자유의 증인이 되었다.
설교적 관점
-이 이야기 속에서 표현된 기적적인 치유는 “회당장”(14절)의 분노를 자아낸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규칙을 지키는 것에 관해 책임을 다하게 되어있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규칙을 잘 이해해야하고 그것들을 가능한 설득력있게 해석해야할 책임이 있다. 한 기관의 책임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규칙에 있어 예외가 되기를 바라는지를 알고 있다. 자신들의 책임을 진지하게 감당하려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믿고 맡겨 준 것을 생각하면서 어떤 의무감을 느낀다. 규칙을 준수하는 일과 예외적인 경우를 허용하는 것 사이에는 운용의 미가 따른다. 가장 안전한 선택은 그냥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항공사 관계자나 자동차 등록소의 직원에게 당신의 상황을 설명하던 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Noah Feldman은 뉴욕타임즈 지에 소위 “현대정통 유대교” (modern Orthodox)라 불리우는 그룹이 운영하는 종교학교에서 자신이 교육받은 경험에 관해 쓰고 있다.그는 이 운동의 회원인 어느 외과의사가 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내용을 소개한다. 그 외과의사는 토라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범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고 하였다. 토라에 대한 이런 이해는 (물론 모든 유대교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려하는 가를 강조한다. 비록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안식일을 범할지라도 이 관점이 지닌 논리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생명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규칙이 자신들과 가까이 있는 누군가를 억압하는 것으로 될 때 그 규칙에 대해 보다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그들은 이럴 때 그 규칙이 지닌 불의한 점을 보기 시작한다. 이런 점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많이 논쟁이 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예는 없는가? 최근 몇몇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삶의 가치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정한 날을 쉬는 날로 정하고 그 날은 쇼핑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끄고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는다. 우리는 휴식과 자기성찰의 날을 소중히 여기는 그 지혜를 인정하고 또 그 날을 지키는 데 필요한 개인적 훈련도 인정한다. 하지만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어느 규칙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가능할까?
-예수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누가는 그 선언을 몸이 뒤틀리는 질병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자비를 보여준 그 분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누가복음의 이 이야기 다음에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짧은 두 구절이 뒤따른다. 첫째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18절) 그리고 둘째 구절은 “그것을[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20절) 오늘 고통을 당한 여인의 이야기는 이 질문을 예상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궁극적으로 무엇인가하는 그림을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가 있는 그곳에 그 나라가 있다. 예수가 있는 그 곳에 일들이 올바르게 되기 시작한다. 예수의 사역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세상은 회복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함이 없을 것이고 몸이 부러지거나 뒤틀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개인에게 선한 것과 모두에게 선한 것 사이의 갈등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 궁극적 미래라면, 우리는 그 나라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기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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