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4장 1. 7 ~ 14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2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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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나는 축복이 되고 싶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한 가지 소원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던 것이 기억난다. 내 기억에,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마 3살쯤 되었을 때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뭔가 좋은 것이고 기독교 신앙과 관계된 것이라는 정도만 짐작했지 그 이상은 몰랐다. 나이가 들면서 축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고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축복을 예수님, 하나님, 성령이 착한 어린이에게 일상적으로 해주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른들을 존경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장난감은 같이 갖고 놀고, 가족과 다른 사람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이런 축복은 가끔만 통했다. 주일학교에서 어느 날엔가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Yes”가 아니라 “No”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비현실적이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하는 기도를 - 예를 들어 도시에 살면서 조랑말을 달라고 기도하거나 대통령(당시 내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아니면서 가장 능력 있는 존재였던)이 인종차별을 중지하는 선포를 발표하여 미국 내 인종차별이 없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축복은 더 복잡하고, 애매하고, 유별난 것이 되었다. 내가 청년이 되면서 할머니가 축복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축복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축복이 쏟아지는 시간과 공간으로 급하게 움직여 다녀야 한다.

  오늘의 본문은 팔레스타인의 결혼 잔치 관습의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남자 손님들은 각자의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있고, 중앙의 자리는 부와 권력과 지위에 따라 택해진 사람이 앉는 명예스러운 자리가 된다. 나중에 더 높은 지위의 손님이 오게 되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다른 자리로 옮기도록 요청을 받는다. 예수는 <나중에 더 높은 자리로 옮겨 갈 수 있게 우선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실용적인 가르침을 줄 뿐 아니라, 더 깊은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을 주기 위한 초청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쌓아 놓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선행을 과시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축복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의 초대인데, 이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드러냄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매일 서로 간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가 피조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는 우리가 집이나 연회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기를 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가 가르치시는 교훈 전부가 아니다. 잔치를 주최하는 자를 위한 지혜와 경고와 축복의 말씀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나중에 답례로 잔치에 초청받기 위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하는 식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침몰하는 배에서 계속 의자를 쌓아 가며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아무 효과도 없고, 단기적인 일이다. 예수는 누가 초대되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신다: 하나님의 나라의 구체적인 구성원들, 즉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이다. 이타적인 호혜와 친절을 통해 드러나는 진정한 환대는 축복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며, 부활과 함께 주어질 축복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닫게 한다.

  축복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회중들의 삶과 관련하여 본문을 고찰할 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축복이 되려 하는지보다는어떤 방식으로 축복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의로움 혹은 의로운 삶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건전한 도덕적 원칙에 따라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내 할머니는 당신의 삶에서 <역사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눈에 보이게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일상 속에서 축복이 된다는 것의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적게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하고그들이 우리 공동체의 삶에서 하나님의 무수한 축복의 진정한 근원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분명히 먹는 것에 몰두했다. 예수는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7:34 11:19)라고 불리었을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에는 먹는 것, 잔치, 밥상, 식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등 다른 어느 복음보다 이런 예가 많다. tapeza 또는 식탁(또는 식탁 옆에 앉거나 비스듬히 누워 있다는 뜻으로)은 주님에게 가르치고(22:24-30), 꾸짖고(11:37-41)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는(7:39) 중요한 장소였다. 식탁은 나아가 어떤 비유에서는(16:21) 초점의 장소이기도 했다. 식탁이 누가의 예수에게 친교와 말씀의 중요한 자리였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본문에서도 역시 식사 자리인데, 이번에는 gamos 즉 결혼 잔치였다. 결혼잔치 자리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에 좀 더 예법에 관한 의식이 제고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주어진 교훈은 공동식사가 그들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는 이후의 초대기독교공동체의 친교의 기초가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구세주의 입에서 교훈을 말함으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더 나아간다.    

- 7-11절은 결혼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교만에 대한 교훈을 준다. 사람들이 친교 모임에서 자기 권력의 확대를 꾀하는데(솔직히 우리 모두는 어느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선호한다), 예수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준다. 그래서 예수는 높은 자리에 앉거나 자기 허영심으로 인해 모욕당하지 않고, 이러한 특권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기분 좋게 행한 사람은 주인이 도리어 더 좋은 자리를 찾아주고 높여 줄 것이다.  

- 예수가 준 이 교훈의 본질은 히브리 지혜 전통의 유산이다. 지혜문학은 세대를 거쳐서 어떻게 세속적 삶의 일상을 품위있고 총명하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적 가르침을 보여준다. 이번 경우에 예수의 교훈은 공동식탁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내려놓고 겸손한 방책을 권유하고 있다. 비슷한 교훈이 히브리 지혜 전통에도 있다. 예를 들어 잠언에는 교만을 경계하는 수많은 경구와(6:17;8:13;16:5;16:18-19;21:4;30:13) 겸손을 옹호하는 격언이 있다(15:33). 이러한 경구들은 누가14:7-11의 예수의 교훈의 요지를 보여준다. 잠언에는 또한 식탁예절(23:1-3), 높은 사람과 함께하는 식탁예절(23:6-8, 20-21,30-35)을 다루고 있는데 모두 피해야 할 행동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마도 예수의 14:7-11의 교훈과 가장 유사한 것은 잠언25:6-7일 것이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높은 사람의 자리에 끼어 들지 말아라. 너의 눈 앞에 있는 높은 관리들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 잠언과 예수의 교훈이 내용이나 묘사 그리고 형태에서의 유사함이 예수의 교훈이 잠언에 많이 의지하고 있고예수의 교훈 자체가 세상일에 관심하는 지혜문서에서 왔다는 의문을 갖게 한다이것은 또한 상황에 있어서도 잘 맞아 보이는데 1절에서 이 이야기가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에서 안식일 잔치를 하는 것이고, 7절에서 예수의 말은 초청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다그러기에 우리는 예수가 교만하지 못하게 하고일반적으로 공동식사의 동력을 끌어올리려는 듯이 보인다한데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 22:30절에서 trapeza 식탁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공동적 친교의 자리로 비유된다마찬가지로 24:30에서는 식탁은 영적으로 해석되는데부활하신 메시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소에서의 행동으로 여겨진다누가에서 식탁의 이미지가 밥 먹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상징으로 변환되고 있기에아울러 예수의 교훈도 더 큰 의미를 가진다먼저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권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주님의 식탁에서 높은 자리로 옮기는 것은 오로지 주인되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고이러한 우선권에 대한 주제넘음이 그들을 하나님의 식탁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한다나아가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권에 대한 추정을 단념시키고하나님의 나라에서 자기발전의 허망함과우리 모두는 주인의 뜻에 따라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 7-11절은 하나님의 통치에서의 삶의 본질에 관한 증언을 보여주는데, 그곳에서 특권의 추정이 - 개인뿐만 아니라 그룹들 즉 인종, 민족, 계급, 성별, 국적 그리고 언어 – 우리를 구별해 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예수 안에 사는 집단생활에서 우리는 언제나 11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 12-14절 또한 직관에 반한 메시지를 계속하고 있는데, 우리는 식탁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같은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대단히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식탁을 제공해야 한다. 이 교훈은 이 세상에서의 일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에 관해서도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 듣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오는 잔치에서도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임을 알게 한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큰 존경을 받고, 호의를 얻으며 영광의 자리를 향유할 것이다.  

  목회적 관점

 이 본문에서, 예수는 절망적인 환자를 치유하시고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의 집에서 식탁 교제를 나눈다. 의료적 치료라는 예수의 선물과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의 집에서 받은 환대에 대한 예수의 개인적인 반응은 둘 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여정 동안 계속되고 있는 갈등이라는 누가의 주제를 심화시킨다.

본문은 예수의 네 번째 안식일 논쟁이다(눅 6:1-5; 6:6-11; 13:10-17).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하는 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해서 그를 싫어했다첫 번째 경우(눅 6;1-13, 막 2:23-3:6과 마 12:1-14 병행)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곡식을 훑었고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한 것을 어겼다고 그들을 고발한다예수는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출애굽이라는 선물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라는 신명기 5;13-15의 안식일 명령으로 반격한다안식일이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관점에서누가복음은 예수가 인간 생명의 충만함을 파괴하는 질병에서 해방을 주는 것을 보여준다.

치료에 덧붙여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지도자와 함께하시는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14:1).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의 적대감의 대상이었지만, 그들과의 식탁 교제를 하는데 뜻밖에도 자유롭다. 예수는 식탁에 앉아서 빵과 잔을 나누는 것으로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과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이런 아이러니를 심화시킨다. 예수는 “솔로몬의 지혜”( 25:6-7)을 인용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손님들에게 왕궁에서나 귀족이 초대한 식사에서 적절한 예의를 알려주는 전통적인 지혜를 따르라고 말한다. 손님은 연회 책임자를 재촉하지 말고, 매력적인 주인 옆으로 초대되는 행복한 기회를 위하여 더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더욱 대담하게, 예수는 주인에게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지 말고,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다리 저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을 초대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 기묘한 복종에 대한 보상은 의로운 자의 부활로 선포될 것이다. 의로운 자의 부활로 인하여 인간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회적 경계들과 불공평한 분열이 심판받는다. 예수 자신이 누군가의 환대를 공유하는 것으로 구체화되는 이 반전은, “지혜의 자녀들이”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낸다( 5:29-32; 7:33-35). 누가는 연회의 전통적인 예절을 뒤집는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환영법은 가장 낮은 자를 높이 올리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출세주의자들은 높은 자리로 초대받으려면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가 식탁 교제에서 치유하고 실천한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유가 되었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13:29; cf.  107:3). 예수가 예를 들고 가르친 것은 그러므로 마리아의 노래(1:46-55), 스가랴의 노래(1:68-79), 평지설교(6:20-49)에 있는 누가의 중심 강조점들과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확인된다. 예수의 목회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공하는 목회 사역의 기초를 예시한다.

칼 바르트는 우리의 목회 사역을 위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다양한 사역 가운데 하나로 친교(코이노니아)에서 이런 종류의 환대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 공동체가 친교를 확립하기 위해 행동할 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친교를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게신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이 친교를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확립하신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사람들 사이에서 친교를 확립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교를 증언하도록 부르신다. 바르트는 네 가지 차원에서 개념을 설명한다:

1. 모든 나라에 교회가 있는 것처럼, 우리 세상에서 국가와 인종과 언어적인 장벽을 극복한 사람들 사이에 통합을 제안한다;

2. 인종적인 차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교회는 공동체를 “특별히 백과 흑 그리고 갈색 회중으로 나누는 것을 합법화하거나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거부한다.;

3. 인간의 문화의 다양성에 대하여 응답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목회는 서로 다른 민족들이 문화적인 차이들을 신성시하거나 축복하기보다 함께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도록 한다; 그리고

4. 기독교 공동체의 목회 사역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인 계급 구분을 무시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스스로를 계급이나 이해관계에 대한 관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 어떤 계급의 도덕성과 정신과 동일시한다면 치명적으로 아프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르트의 목회신학은 기독교인이 환대를 실천하고 세상의 국가적,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계급 구분을 치유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라고 제안한다. 이 위대한 신학자를 숙고하면, 환대와 친교는 교회의 목회의 중심이 된다.

누가는 이 장벽을 없애는 환대에 대한 아름다운 증언으로 마리아와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한 일을 설명한다. 베들레헴에서 마리아는 아기를 낳아 말구유에 놓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2:1-7).” 예수의 탄생은 그래서 여관에서 아기를 환영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을 허무는 것이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윗 왕조의 자손으로 구체화된다. 구유의 환대는 공동체들의 경계선에 세워진 장벽을 파괴하고, 두려움과 혐오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제하도록 압박하는 것을 극복하는 식탁에 낯선 사람과 동료를 초대하는 것에 대한 누가의 특별한 강조를 위한 패러다임이 된다.

  설교적 관점

 -겸손은(humility) 분명히 덕목이지만 겸손하라는 권면은 스스로를 낮게 생각하면서사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다. 어느 교인이 교회 일년 예산 약정헌금이 목표치에 모자란 것을 보고 모든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 사람 중 정부 보호시설에 살고있는 한 교인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적은 수입이 교회의 필요한 예산에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끄럽고 슬프다며 목사님에게 털어놓았다. “가장 낮은 자리” (the lowest place)를 취하라는 이 본문을 읽고 설교하는 일은 위험요소가 있다. 이미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더 비우라는 요청으로 들을 수 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몇몇 사람들은 이 본문을 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들을 수도 있다. 이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 앉기 위해 가장 겸손한 자리에 앉은 사람이 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자기들끼리 경쟁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상황에 달려있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7) 상황에서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높이기보다 낮추라는 윤리적 훈계는 자신들의 이력서에 너무 도취된 사람들에게는[스스로를 높이는 사람들] 약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어느 것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가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가 많지만 오늘 예수의 이야기는 진리를 말한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관점보다 더 많은 것을 고려한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신입교인들을 만날 때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직분을 맡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첫 번째 달착륙 지점을 선정하는데도 참여했던 과학자였는데 그는 “나는 교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그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는 듣는 이들에게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찾아보라고 남겨 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이 본문이 윤리적 명령의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겸손함이 별로 없는 곳에서 혹은 공동체의 가치를 조성함에 있어 좀 겸손할 것을 말할 상황에서), 이 본문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우리는 이 본문의 11절을 예수를 기념하는 초기 찬송이자 신앙고백인 빌립보서 2:6-11과 연관하여 읽어야만 한다“그는 스스로를 낮추셨고...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다.” 예수는 자신의 삶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가 가르쳤던 것을 구현했고 그리고 그가 구현했던 것을 가르쳤다.

-사도신경을 암송하거나 노래할 때 우리는 이 신조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에서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로 점프하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예수의 전 생애는 한 구절과 다른 구절 사이의 쉼표사이에 무언가 숨겨져있다. 이 신조는 예수의 비유, 설교, 제자들에게 준 교훈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신조에는 또 겸손이나 그 밖의 덕목에 관한 훈계도 없다. 잘못된 생략인가? 모든 가르침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다 분명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비교할 무언가를 찾으려면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힘있는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다: 빌라도, 가이사, 헤롯, 가야바.  당시 상황에서 권세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뒤의 일들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11)

-겸손을 배우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예수께서는 안식일 만찬을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두 번째 훈계를 추가하고 있다.  잔치를 베풀 때에 훗날 갚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말라고 한다.“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13) 이것은 손님들을 부를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문자적 명령인가? 아마도 충분히 문자적일 수 있다. 적어도 잔치를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상처받고 고통당하며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으로 그들이 눈에서 멀어져서 마음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가르침은 또한 선행에 대한 댓가로 무언가를 얻으려는 태도보다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형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예수의 이 말씀은 태도보다는 자신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향하여 방향을 정한다. 모든 시대와 사회에 있어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어떤 사람들 리스트가 있는 것 같다 (시대마다 이름은 다를지라도). 예수께서는 이 시대와 장소의 경계를 넘어 우리들에게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별하라고 하면서 이런 편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도전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 6:3) 그를 본받고 그의 삶을 따르도록 부름받았다. 세례를 받은 삶은 전형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12:2])        

-예수의 두 번째 말씀은 첫 번째처럼 윤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잔치” (banquet)라는 말이 그 단서를 제공한다신약성서에서 잔치는 하나님의 통치천국을 상징한다“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계 19:9) 주의 만찬은 (The Lords Supper)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또 남과 북에서 와서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눅 13:29)때의 그 결혼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주인은 늘 초대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초대를 당연하게 여기지 못했던 사람들을 이미 초대한 그 분 (the One)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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