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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3장 31 ~ 3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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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은유적 의미로 가득 차있다. 외적인 여행과 내적인 여정은 사순절의 주제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현실적인 도전이 많지만, 영적으로는 희망이 넘친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조금씩 접근하면서 생애 마지막 순간을 재촉하게 된다. 다윗의 성읍이었던 예루살렘은 수많은 예언자들을 무시하고, 비방하고, 죽였던 도시다. 예언자들이 당한 수모는 다음의 구절들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렘26:23 (“ 그들이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 묘지에 던졌다.” ); 렘38:4-6 (“ 그래서 그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붙잡아서, 왕자 말기야의 집에 있는 물웅덩이에 집어 넣었다. 그 웅덩이는 근위대의 뜰 안에 있었으며,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밧줄에 매달아 웅덩이 속으로 내려 보냈는데, 그 물웅덩이 속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예레미야는 진흙 속에 빠져 있었다.)
  예수도 그와 비슷하게 예언자적 최후를 맞이하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갔다. 이 여정은 하나님이 정한 거룩한 길이어서,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파스 (여우)의 위협도 예수의 가는 길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헤롯도 (마2:13-18), 예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나사렛 사람들도 (눅 4:29) 그 길을 막을 수 없었다. 도리어 잠정적인 어려움은 예수가 그 길을 끝까지 가려는 확고한 의지를 강화시켰다. 
  예수가 예언자의 전통을 따라 예루살렘 세력과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은 이사야가 예루살렘 신학(다윗 왕조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나라의 성취라는 믿음)을 비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Brueggemann은 “ 제왕 의식(royal consciousness)”과 “ 예언자 의식( prophetic consciousness)”을 대조시키면서, 언약의 법 아래 모두가 자유롭게 사는 모세의 대안적 공동체가 국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제왕적 전통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지적한다. 
  예언자는 귀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지만 그들은 듣지 않는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사2:2) 이렇게 평화가 이루어지는 날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다. (사2:4) 이것은 원래 아담에게 주었던 창조 세계의 청지기적 사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런 예언은 이스라엘이 성전에만 집착할 때 이루어질 수 없다.

  예수가 당신을 배척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이런 장래의 희망에 대한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예수는 “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눅13:34) 라고 탄식하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암탉이 상징하는 의미를 찾기 위해 신명기 32:11-12에 (“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 나오는 독수리와 연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암탉의 이미지는 독수리와는 아주 다르다. 암탉의 은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1:2-3과 창1:2을 같이 보아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운행하고 계셨다는 표현(창1:2)은 (hovering over, moving over, broodin over,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등으로 해석) 암탉이 병아리나 알을 품고 있는 것과 잘 연결된다. 암탉은 로마의 상징이었던 독수리나 헤롯을 상징하는 여우와는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독수리도 [성경에는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그 집들은 모두 파괴될 것이다. 새로운 왕국에서는 권력과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겸손하고 신실한 모습으로 다스리는 창조의 주를 따르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예수는 그런 미래를 향해 역경을 무릅쓰고 행진하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 본문에서 헤롯은 대 헤롯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이다. 대헤롯의 뜻에 따라 안타파스는 그의 죽은 후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했다. 한데 로마황제가 그에게 왕의 칭호를 허락하지 않고, 분봉왕(tetrarch 3:1)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명백히 그의 지위와 권위가 왕보다 밑에 있음을 보여준다. 안티파스는 자신의 힘으로 통치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뜻에 달려있었다. 유대인들은 헤롯가문을 부역자(collaborator)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헤롯 왕조를 전혀 지지하지 않았다. 대헤롯의 편집증은 병적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인들이 버팀목이 되 주었기 때문이다.  

▶ 예수도 안티파스를 상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사역하는 동안 안티파스와 연관된 두 도시-그의 첫 번째 수도였던 세포리스와 세포리스를 대치하기 위해 세운 티베리아스-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이 도시들은 예수가 선포한 왕국의 안티테제를 대표했다. 그 도시들은 갈릴리 민중의 로마화를 시도한 유물이었다. 예수는 백성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했다. 그들의 조상의 종교적 전통에 대한 헌신을 갱신하도록 요청했다. 안티파스와 그의 지지자들도 또한 갈릴리 백성들을 새로운 세계– 그 세계의 중심이 로마이고 그것의 가치가 복음의 가치와 반대되는-로 인도하려 했다.   

▶ 동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예수도 헤롯 가문을 하나님의 의해 약속된 다윗 왕국의 찬탈자로 여겼다. 인기가 높았던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예수도 안티파스와 헤롯가문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다가올 “ 하나님의 왕국” 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안티파스와 지지자들을 편치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는데 누가만이 이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의 재판에서 안티파스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도 누가에서만 나타난다(23:6-12). 헤롯과 호위병들이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한 것은 안티파스가 예수를 그의 경쟁자로 여기고 더 이상 그의 통치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을 보여준다.   
 
▶ 예수가 헤롯을 “ 여우” 라고 부른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헬라에서는 여우가 영리하지만 교활하고 파렴치한 동물로 여겨졌다. 구약에서 여우는 파괴와 연관된다(아2:15;겔13:4). 유대정결법에는 자칼을 부정한 동물로 분류한다. 아무튼 예수의 언급은 안티파스에 대한 경멸이 반영되어 있다. 예수는 당신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것을 막으려하는 안티파스를 무시한다. 요한복음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요7:30;8:20;8:59;10:39;11:54)를 반영하듯, 누가는 예수가 하나님이 설정한 그의 고난과 죽음의 때까지는 그의 적들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정하신 그의 운명이 기다리는 예루살렘까지는 그의 사역과 여정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티파스는 결코 그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 33절의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과 31절의 안티파스가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은 누가로 하여금 이 시점에서 이 도시에 대해 예수의 언급을 추가한다. 마태는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한 예수의 비탄이 성에 들어간 후로 묘사하는데(마23:37-39), 좀더 논리적인 배치이다. 누가는 예수가 이 말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했다고 기술했다. 도시가 예언자를 죽인다는 고발은 예언자의 운명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성서의 전통이기 보다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주후 1세기의 위전(僞典)인 <이사야의 순교>에서 므낫세가 이사야를 톱으로 반으로 잘라 죽였다고 했는데, 이는 탈무드나 다른 초기 유대작품에 나오는 전설이다. 구약은 이사야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데, 히브리서11:37에서는 이 전설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구약에서도 가끔 예루살렘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실패하는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한다(사3:8;렘13:27;겔16:2).

  ▶ 누가는 예수의 예루살렘에 대한 비탄을 모두 회개를 촉구한 비유 모음의(13:1-30) 뒤에 배치했다. 이것은 누가가 얼마나 그것이 중요한가를 알고 있다는 열쇠가 될 것이다. 예수의 예루살렘에 대한 비탄은 도시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기보다는 회개에의 촉구이다. 예루살렘을 그를 통해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예수의 감동적 은유가 바로 예수가 도시의 파괴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예고한다는 증거이다. 이사야(60:4)와 스가랴(10:6-10)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흩어진 아이들을 함께 모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난처를 발견하는 이스라엘의 이미지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 (신32:11; 룻2:12; 시57:1; 61:4; 91:4). 

▶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기 위해 이스라엘은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명과 메시지를 인식하도록 예루살렘에 도전하고 있다. 예수는 백성들이 여러 번 실패하는 것에 애통해 하신다. 마지막 절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이스라엘이 알 때가 올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누가는 바울의 주장하듯이 유대인을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왜냐하면 아직도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과 같이 이스라엘도 장래의 어떤 순간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누릴 것이다(롬11장).  

▶ 34절의 “몇 번이나” 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말하듯 예수가 예루살렘을 여러 번 방문했음을 암시한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오로지 한 번만 예루살렘에 갔다고 말한다. 종종 요한복음은 예수의 사역을 설명하는데 있어 역사적이기 보다는 신학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가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하는 기술이 훨씬 더 역사적인 반면에 공관복음서에서 한 번만 방문했다는 것은 아마도 훨씬 신학적인 동기가 작용했을 것이다.   
 
목회적 관점
 
우리는 지위와 권력에 집착하는, 그래서 정치적인 음모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다. 가장 분명한 사례가 정부 기관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후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실제 자기보다 더 좋게 보이려고 하고, 그들의 경쟁자는 실제 그들보다 나쁘게 보이도록 한다. 우리 역시 좀 더 평범하지만 마찬가지의 음모를 만나게 된다. 직장에서 동료가 교활하게 다른 사람이 낸 대담하고 돈벌이가 되는 아이디어를 가로채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 직장 정치” 라고 부른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누가 다음번 목사가 될지, 선교비를 어떻게 분배할지, 친교실에 어떤 색 카펫을 설치할지 등에 관해 결정할 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행동들을 “ 교회 정치” 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정치 현실에 대해 순진하거나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자세하게 읽지 않은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정치적인 음모에 낯설지 않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 실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눅 13:30) 꼭대기, 안락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결국은 꼭대기에 있지 못하게 되고, 반면에 지금 바닥으로, 마지막 자리로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결국 첫째가 될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충고보다 더 급박한 경고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예수가 이런 충격적인 말을 한 “ 바로 그 때”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즉시 도망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다.(31절)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를 보호하려고 경고하는 것 같은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복음서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와 친구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선포한 대로 ‘ 첫째’ 가 결국 ‘ 꼴찌’ 가 되는, 뒤집어지는 나라가 온다면 가장 위협받는 사람들에 속했다. 왜, 갑자기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안전을 그렇게 염려할까? 그들에게 불순한 동기가 있었으리라. 아마도 그들은 헤롯의 일파로, 예수를 헤롯의 관할구역에서 쫓아내 빌라도가 책임지고 있는 영역으로 보내려는 것이리라. 우리 시대의 지자체가 중앙정부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적어도 헤롯이 이 말썽장이가 하는 일에 대해 비난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아마 빌라도는 예수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예수에게 와서 헤롯의 위협을 전해 준 동기라는 것이 널리 인정되는 이론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음모처럼 보이는 겉보기에 친절한 경고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서도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예수는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비열하고 계산적인 헤롯과 한패가 된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말한다(32절).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에게 자신이 정치적으로 순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예수는 특히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침으로” , 그가 선포하고 세우는 나라가 권력을 모욕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예수는 그의 도전은 줄곧 꼭대기를 향해 갈 것이라고 그들에게 알려준다. 그는 지방에서 멈추지 않고 그의 때가 되었을 때 수도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계속 나아갈 것이다. 그러면 곧 빌라도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주정부청사의 문으로 들어가서 멈추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
그는 워싱턴 DC.에 있는 의회나 백악관에 가서야 멈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혹은 워싱턴)이 차분하게 그를 맞이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은 “ 예언자들을 죽인 도시” 이고 그 자신의 복지를 위해 파송된 사람들을 죽였다(33-34절). 마찬가지로 워싱턴은(다른 수도들과 함께) 너무나 자주 새롭고 보다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꿈들이 죽은 곳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경멸과 폭력을 당할 거라고 예상하지만, 그러한 증오의 분노에 자신의 분노를 얹어서 되돌려주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혁명적인 통렬한 비난으로 이끄는 말(헤롯의 살인행위를 상기시키고 예언하는, 품위를 손상시키는 이름으로 부르는)로 시작될 수도 있었다: 예언자를 죽인 자들을 죽여라! 악한 예루살렘을 불태워라!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하는 대신 어머니의 탄식으로 바꾸어 말한다: “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34절) 이 말씀에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 날개 밑으로 너희가 보호를 받으러 왔다” 는 구약성경의 말씀이 반영되고 있다(룻 2:12; 참조 시 17:8 36:7, 57;1, 61:4).


이러한 놀라운 말들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새로운 빛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헤롯, 음모를 꾸미는 바리새파 사람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나중에도 지금도 첫째이려고 하는 모든 첫째들. 그들은 그들의 잔인하고 교활한 술책 뒤에서 자신들을 불멸하는 제국이라는 우주의 주인으로 여기고 싶어 한다. 예수는 그들의 이름을 죽음을 거래하는 자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예수는 또한 그들을 폭풍속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너무나 두려워하면서도 어미닭의 그림자 아래에서 피난처를 찾기에는 너무나 고집불통인 앞마당의 병아리라고 본다. 이들 거물들이 무시무시한 송곳니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라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거의 우스꽝스럽게 삐악거리는 소리로 들린다. 그들이 그들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그들에게 내릴 심판은 그들 자신의 자기-파괴라는 심판이 될 것이다: “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35절) 정치적인 음모는 계속되지만, 그러나 진실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다. 여우들은 자기가 그렇게 관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관리되지 않는다. 


설교적 관점 


-미국에서 남북전쟁 전 노예들은[노예해방 이전] 노예로 살면서 단지 눈에 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존재하는 사물 뒤에 깊고 넓고 높은 면을 보려고 하였다 [눈에 보이는 노예로서의 삶-현실-이 힘들어 소망을 갖기 위한 노력]. 그래서 흑인노예들의 신령한 노래인 흑인영가는(Negro spirituals) 주어진 사회체제를 넘어서서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로운 사회체제를 꿈꾸고 있는 데 그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세속의 권세가 만들어내거나 통제하는 곳이 아니다. 어느 흑인영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좋은 방이 많이 있네, 좋은 방이 많이 있네, 좋은 방이 많이 있네” (“ There’ s plenty good room, plenty good room, plenty good room in my Father’ s kingdom.” ) 누가에게 있어서 이것은 중심적 메시지이고 반복되는 주제이다. 사순절 둘째주일을 위한 
복음서에서 예이 찢어짐을 말하고 있다: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눅 13:34-35, 새번역)

 -예수에게 있어 하나님의 열정적인 꿈, 자애로운 바램 그리고 굳은 결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다 가까이에 즉 하나님의 품과 사랑 안으로 모으는 일이다. 예수의 사역 중심에 있던 일은 바로 이 과제 및 그것을 위한 헌신이다. 암탉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내어 품고 포용하며 환영하여 에덴에서부터 추구해왔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들기를 바라신다. 누가복음은 이 핵심적인 메시지를
예수의 생애를 말하면서 처음부터 예시하고 있다. 메시아의 기쁜 소식이 맨 처음 들려진 사람은 목자들이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성서에 나타난 세계에서 목자들은 예의바르고 점잖아서 존경을 받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Raymond Brown은 자신의 책 메시아의 탄생 ( T h e B i r t h o f  t h e M e s s i a h ) 에서 “ 예수 당시 목자들은 점잖거나 고귀한 사람들로 여겨지기는커녕 종종 정직하지 못하며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로 취급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 목자들은 초기 랍비들에 의해 법관이나 증인이 될 수 없는 리스트에 올려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주 자기들의 가축들을 다른 사람들의 땅에서 풀을 뜯어먹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목자들은 사회의 가장자리,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하지만 복음은 주변부를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성과 새로운 공동체 출현을 위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 그 새로운 것은 사회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눅 2:10-11) 

-누가는 예수께서 이런 관심 밖의 사람들을 돌보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며 사회체제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도록 하려는 지속적인 의도가 있음을 보았다. 누가는 바로 여기에서 예수의 메시아적 메시지의 핵심을 본다. 그래서 누가는 한 시골소녀[마리아]가 구세주의 오심 속에서 혁명적인 노래를 부르게 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눅 1:46-47, 새번역, 이하동일)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고향 집에서 아버지에게 환영을 받은 탕자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아버지의 긍휼은 이해할 수 없고 그 사랑은 도가 지나쳐보인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없다고 종종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누가는 또 예수 옆에서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  “ 선한 강도” (good thief)를 상기시켜준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할 때 그는 바벨론 유배시절 이사야의 예언과[제3이사야] 자신의 사역을 동일시한다. 그 예언은 하나님의 영을 선포될 기쁜소식, 변화될 삶, 바뀌어질 사회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 선언은 개인과 사회의 변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18-19). 사도행전 서두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까지 이르러” (행1:8)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일의 시작은 오순절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즉 혈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새로운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고 예수와 함께 있었던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질 때 새로운 인간사회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바로 그 다양함이 새로운 태피스트리(tapestry, 여러 색실로 짠 주단)로 짜여져서 옛 예언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새로운 인간성이 현실화된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행전 2:17-18)

-그 늙은 노예들은 예수께서 전한 복음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가 끝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고 영원히 우리를 품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좋은 방이 많이 있네, 좋은 방이 많이 있네, 좋은 방이 많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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