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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11장 1 ~ 11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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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적 관점
 
   예수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향해 계속 가는 중에 생긴 이 사건은 극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4복음서 모두에 소개되어서 예수에 관한 전승 중 초기에 속하는 중요한 것으로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마가 고유의 신학적 윤리적 특징도 중요하다. 예수는 왜 환호를 받으며 적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로 결정했나? 예수가 그렇게 함으로 잔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고도 입성한 것은 그의 대적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나? 하나님의 뜻 이외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에 의한 것이었나? 
  본문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는 독자들은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마지막 입성이고,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마가복음에서 이전에 3번에 걸쳐 예수는 그가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적들의 손에 넘겨져, 죽고, 부활할 것임을 제자들에게 말하려 했다. (8:31-32; 9:30-32; 10:32-34)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운명이나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지금까지 예수는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가 누군가에 대해, 그가 어떤 권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유월절 한 주 전에 군중들의 환호를 받고, 온 천하에 예수가 메시아적 예언을 성취한다는 것을 밝히기를 원하듯이 공개적으로 예수살렘에 입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가 군중들이 기대하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한 주일 안에, 환호는 멸시와 조롱으로 바뀐다. 종려주일은 성금요일로 연결된다. 추앙받던 예수는 멸시받는 예수가 된다. 우리는 이 두 다른 날의 대조를 통해 모든 모순을 무색케 하는 특별한 존엄(dignity)의 계시를 보는 것인가? 어리석음의 중심에서 영광을 보는 것이, 최종적 죽음에서 생명의 힘의 발현을 보는 것이 가능한가?
  예수의 고난을 오늘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고난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멸시와 천시 속의 진정한 존엄의 의미도, 오늘날 조롱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지 않고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멸시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사회 질서 유지라는 명분으로, 우리의 순결성과 자존심을 지킨다는 핑계로, 스스로 의인을 자처하면서, 그들을 국외자로 취급하고, 수치심을 강요하고, 유기하고, 더 이상 보기를 거부한다. 
  종려주일에 예수에게 드려진 존엄을, 성금요일과 단절하여 생각하거나,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한 굴욕을 예수의 수난-죽음과 일치시키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거나 타자들을 격려하려 할 때 너무 쉬운 위로가 아닌가? 그렇다면 니체가 기독교를 피해자(victims)의 종교라고 한 것이 맞지 않은가? 부당한 멸시 천대를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닌가? 부당한 고난을 당한 사람이 거짓된 비난에 대항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정당한 존엄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 그런 말은 매우 부적절하다.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는데, 이는 왕이 평화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는 평화 속에서 입성했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는 그를 파괴하는 세력에 대항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들이 예수에 대항하는데 힘을 모으는 것을 허용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는데도 그것에 대항하지 않음으로 그의 존엄성은 상실되지 않았나? 그것은 비굴한 굴종이 아닌가?
  여기에서도 성금요일의 어두움으로 종려주일의 광명을 변형시켜야 한다. 즉 이 두 가지가 연결될 때만 우리는 존엄성은 온전함(integrity, 통합성, 통일성)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잘못된 심판과 의혹과, 노예적 공포와 폭력, 심지어 죽음의 위력은 객관적인 모습 그대로 먼저 파악된 후에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극복되는 방식은 악의 작동방식을 따를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 모든 죽음은 삼킴을 당했다. 예수의 굴욕을 통해서, 모든 굴욕은 변형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죽음이나 굴욕 자체 때문이 아니고, 파괴되지 않는 사랑 때문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그 거민들이 평화를 도모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할 때, 그가 전쟁에 대해 저항하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죽음이나 그 어떤 것도 파괴하거나 침묵시킬 수 없는 생명과, 사랑과 존엄성에 대한 강력한 증언의 목소리를 내면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온 세상에 맞서 일어서야 할 때가 꼭 온다.  

 주석적 관점 
 
▶ “ 승리의 입성” 이란 제목을 붙인다면 마가복음의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와 이야기의 결정적 핵심을 말하는 이 구절의 의미를 잡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의 중요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무리들이 예수의 입성을 승리로서 환호할
때, 그들이 무슨 의미로 그렇게 했는지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오해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그러기에 의미를 명확하게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의 본래의 배경과 이 시점까지의 이야기와 그 의도를 상기해야만 한다. 마가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예수를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1:1)로 믿는 자들의 모임에서 읽혀진 것이다. 

▶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에 의해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1:2-8)로 소개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으며(1:14-15), 제자들을 모으고(1:16-17),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수행했다(1-10장). 그는 비유나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가 행하신 기적은 그의 가르침을 형상화했고 그의 정체성을 증언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정점은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한 것이지만(8:29), 예수가 첫 번째 만져 주었던 베새다의 소경처럼(8:22-26), 제자들은 눈을 떴지만, 명확하게 보지 못했다. 예수는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하고 하시면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으실 것과(8:31) 그의 제자들(마가의 청중들)도 영광의 종말이전에 반드시 고난받아야 할 것(8:31-9:1)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 이상의 가르침과 치유들도 앞에 놓인 경고들(9:31;10:33-34)을 강조했다.
세 번째 경고는 예수의 고난의 장소로서 예루살렘을 명확하게 지명했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곳으로 향했는데, 예수가 인도하고 제자들은 놀라움과 두려움(10:32)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 그런데 눈먼 바디매오를 고친 것은 만약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10:46-52) 눈 먼 사람이 온전히 다시 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 이러한 준비와 함께 예수는 이제 그것의 중앙 꼭대기가 상징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성전을 향해 솟아있는 올리브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에 접근한다. 암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다윗왕은 “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면서” (삼하15:30) 올리브산길로 예루살렘을 떠났으며, 스가랴선지자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올리브산에 서실 때 주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기 전에(슥154:9) 산이 둘로 갈라질 것이라고(슥14:4) 예언했다. 바로 이 산에서 예수는 나귀를 데려 오도록 제자들을 미리 보냈는데, 이것은 일찍이 예수가 12제자들을 둘 씩 파송했던 것과 같았다(6:7).  

▶ 당나귀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마을에 매여 있는 새끼 나귀 한 마리(11:2)는 별로 표시나지 않았다. 당당하고 호전적인 말보다 평범하고 온순한 당나귀를 사용한 것도(슥9:9) 마가의 청중에게는 놀라운 것인데 하지만 어리석거나 품위가 없는 것은 아닌었는데 왜냐하면 당나귀는 타는데 보통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 아직 아무도 탄적이 없는’ 이 어린 새끼 나귀는 예식적 사용에 적합하다는 것을 말한다(참조,‘ 멍에를 매어 본 일이 없는 짐승’ 민19:2; 신21:3;삼상6:7). 예수는 당나귀가 어디에 있는지, 만약에 데려오려고 할 때에 ‘왜 이러는 거요?’ 라고 물으며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 일어났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이 그의 목적이 예수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아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가의 독자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예수가 나귀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하지 않았기에 NRSV는 “ 주인이 필요로 했다” 라고 번역하지 않고“ 주님이 필요로 했다” 고 번역했는데(헬라어는 둘다 가능) 하지만 마가는 1:3, 2:28, 5:19에서 예수를 완곡하게 또는 애매하게 주님이라고 칭한 것 외에는 주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주님께서 직접 문제 삼은 ‘ 주님’ 과 연관된 “ 다윗의 자손” 이야기는(12:35-37)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기에 11:2-3에서 우리는 나귀의 거룩한 사명은 예수, 즉 주님을 모시고 가는 것이라는 미묘한 힌트를 얻게 된다.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 온 후에 예수가 그 위에 앉는데 암시적으로 예루살렘에 방문하는 보통 순례자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인데, 이는 마가의 독자들이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슥9:9)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인지한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요한만 종려나무라고 특정함) 이는 유월절 순례자들을 위한 특이한 환영이다.
무리들은 순례자를 향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며 구원의 주님으로 말했다(시편118:26이하와 같이). 마가는 기발하고 전 시가적 축하를 기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걷지 않고 나귀에 타고 왔으며, 무리들은 생나무 가지만이 아니라 겉옷을 길에다 폈다(왕의 환영, 왕하9:13참조). 마가가 말한 “ 많은 사람들” 은 단순히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지 않았고, 단지 그를 모호하게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이라고 축복했다. 그들이 “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라고 한 것은 예수가 다윗왕의 후손이기에 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지나갈 때 그들이 하나님에게 “ 구하여 주십시오” (호산나의 어원적 의미)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호산나를 “ 할렐루야” 와 같은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했는데 그렇다면 이 외침은 누구에게 한 것인가? 모든 장면을 보면 비록 모든 것이 약해지고 조율된 것이지만 왕을 가르키는 낮은 목소리와 결부되어 진다. 

▶ 수 많은 군중들이 전 시내를 행진하면서 크게 외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공공연하게 왕의 메시야를 주창하는 자는 깃발을 꼽고 분명히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지만 예수는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는 것에 무관심한 듯 보인다. 예수는 성전으로 갔지만 단지
둘러보기만 하고 걸어나와 베다니에서 밤을 보냈다. 이 이상한 극적이지 않은 “ 승리의 입성” 의 결말은 마가의 독자들에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리도록 남겨놓는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은 이미 무엇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그들에게 비록 죽음이 패배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다윗 왕국의 재건자로 오해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자신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음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목회적 관점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 자신의 신성을 보는 경험에서 온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안에서 보는 신성은 실제로 거기 있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이 투영한 신성을 제거하기 전에는 그것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심리학 저술가인 Robert Johnson은 말하기를, “ 낭만적인 사랑 혹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다르다. 사랑하는 것은 항상 좀 더 조용하고 좀 더 인간적으로 균형 잡힌 경험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항상 실제보다 과장되곤 한다.”
기독교 영성은 사랑의 투영이기보다 생활의 실천이다. 우리는 피상적인 사랑을 넘어서 지속적인 사랑으로 들어가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한다. 마가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한때 지나가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으로 묘사한다. “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 호산나!’ ‘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8,9절) 종려주일에 대해 생각할 때 1960년대 우드스탁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것이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관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지탱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예수께서 종려 가지 사이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우리가 피상적인 사랑 쪽으로 향하지 않게 해준다. 예수에게는 피상적인 사랑이란 없다. 우리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공포가 수반된 사랑을 받는다. 이런 사랑은 종종 우리가 실제라고 착각하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병사들은 전투에 나가기 전에 책을 대출했다. 전쟁이 끝나면 책을 반납해야 한다는 심리적 책임감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도서관의 책을 반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에서 피할 길을 찾으려고 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예수의 변화를 본 베드로도 이들 병사들 같았다. “ ‘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막 9:5,6) 베드로는 예수님이 받아야 한다고 하신 고난을 깨닫기보다 약속된 영광을 차지하기를 더 갈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를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은 엄청난 고난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두렵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가 쓰기를, 사랑하는 것은 고난 받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모로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두렵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란 것이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대상처럼 장악하고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며, 만약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당신은 단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랑은 현실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고통을 통한 인내를 포함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초대되었다. 그것은 감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입을 비쭉거리는 세 살배기의 얼굴을 씻어주는 부모의 사랑과 같다.
종려주일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오해하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실제 행동들로 측정되어야 한다. 예수는 나귀에 타고 종려나무 사이로 행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런 행위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다.

위대한 기독교 신비가 Simone Weil은 이렇게 썼다. “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 줄 사람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자기의 관심을 줄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다.” 예수가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관심이라는 기적이다. 예수 안에서 세상은 자기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고, 이런 깨달음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치아와 손톱으로 하나님을 위한 투사로부터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피조물로 변모한다.

설교적관점
 
-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결정적인 일이었고 설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 예루살렘 입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사역에 있어 가장 거칠고 정치적으로 격정적인 행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단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귀여운 어린이들을 보며 어른들이 웃는 그런 오프닝 행진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마가복음 11;1-11에서 예수는 세심하게 계획된 카니발 형식을 띤 “ 군사행렬” (carnivalesque “ military procession” )로 정치권력을 비웃는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권세" (powers that be)를 섬기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요청한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예루살렘 입성에서 카니발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중요한 정치적 의미도 밝혀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에서 단지 몇 구절만이 (8절-11a절)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본문 중 대부분은 (1절-7절) 이 사건을 위해 예수가 했던 기획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예수가 이 모든 일을 미리
모든 것을 기획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나귀새끼를 준비했고 제자들이 그 나귀새끼를 보고있는 군중들과 더불어 사용할 신호도 가르쳐주었다. 예수는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있는 일을 알고 있다. 그는 한편의 “ 거리공연” (street theater)을 신중하게 연출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감람산에서 시작하는데 그 산은 전통적으로 백성들이 예루살렘 해방을 위한 최종대결이 벌어질 장소로 알고있는 장소이다. 이 전통적인 장소에서 예수는 자신의 마지막 행동을 시작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전쟁무기가 아니라 나귀새끼였다. 예수는 무장하지 않은 채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예수가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때 그는 승리한 민족영웅을 위한 군사행렬의 형태를 받아들인다. 이 행진에 참여하고 있는 군중들은 승리한 군사지도자가 기대할만한 모든 행동을 한다. 제국의 입장에서 반역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하며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와
옷을 존경의 표시로 예수 앞에 펼친다. 그들은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 만세수를 하소서” 라며 찬양하고 외친다. 그리고 예수는 숭배하는 군중 속으로  나귀새끼를 타고간다.  

 -예수의 거리공연은 정치적인 풍자를 하는 곳이다. 그의 “ 승리의 입성” (triumphal entry)에서 예수는 기존질서와 지배를 풍자하고 대안적인 지배방식을 끌어낸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의 발은 땅을 질질 끌고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아닌 겸손하게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예수는 등장한다. 그는 화려함과 부자로 오지않고 가난한자와 동일시 한 모습으로 온다. 그는 힘센 전사의 모습이 아닌 연약하고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로 다가온다. 예수는 여기서 광대의 역할을 취하여 우스꽝스럽고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즉 다른 형태의 “ 다스림” (rule)으로 다가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 것을 요청한다. 이 사건은 카니발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뉴 올리안즈 재즈밴드 행렬을 생각해보라-여기서는 사회의 하층부 사람들이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폭로하고 도전한다.  

-예루살렘입성은 코믹하고 드라마틱하며 정치적이다. 설교는 이 방식으로 되어야한다. 결국 예수의 거리공연은 설교자로 하여금  풍자하는 일은 기존질서를 폭로하고 저항하는 것일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풍자와 카니발 형식을 통하여 복음과 기독교 예배가 지닌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특성을 살펴보게 한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종려주일 예배는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헌신과 제자도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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