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명백한 교훈은 종교인들은 너무 쉽게 윤리보다는 의식을 앞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적 전례의 상징구조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종교적 우월감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종교적 전통의 더 중요한 진리, 즉
잔인함보다는 친절을, 정죄보다는 연민을 중시하는 대안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무시하곤 한다. 우리는 겉으로 들어나는 외양에 관심을 두느라고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제어하고, 우리의 에너지를 타자들과 더 넓은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사용함으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믿음의 근본적인 요구를 무시한다. 종교에 대한 이런 비판은 정확하고 강력한 것이지만, 오늘 본문을 이 측면에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위선에 대한 예수의 민감한 교훈을 놓치게 된다.
위선은 도덕적 가치나 기준과 행동적 실천의 불일치를 말한다. 그리스어 어근(hypokrisis: 연극에서 배역을 연기함; hypokrinesthai: ...인 척하다)으로부터 우리는 위선이 진정한 삶(authentic life)과 반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선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연출된 삶이다. 자기가 원하는, 만들어진 인격을 전면에 세우고 진정한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특히 종교적 위선은 자기기만을 고양시키기 위해 종교적인 절대적 진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가장 파괴적이다. 위선은 진리의 왜곡이자 진리의 대치물이 된다.
종교인들의 위선은 종교적 진리의 신뢰성에 손상을 주며, 그들을 (그들의 가식적인 경건이 우상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우상숭배자로 만든다. 위선은 사랑과 증오처럼 우리의 경험 속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예수는 인간이 자아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위선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풀이할 수 있나? 틸리히는 자아-진정성 (self-integration, 온전성, 통합성, 통전성)을 자아-창조성 (self-creativity), 자아-변혁 (self-transformation)과 함께 삶의 기본적 기능으로 묘사한다. 삶의 잠재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삶의 중심을 찾아야 하고, 자유와 용기를 통해 거기로부터 나와야 하고, 더 풍성하고 심오하게 된 후에 다시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자아-진정성의 과정이다.
중심은 분리될 수 없지만 강화될 수 있는 자아의 핵심이다. 거리로부터 나오는 것은 온전성의 상실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도덕적 행위이고 영(spirit)의 영역에 속하는 기능이다. 치유와 연관하여 설명하자면, 영적인 건강은
도덕적 통합(integrity), 즉 인격의 중심과 자아의 통합이고 (the self-integration of a person’ s center), 영적 질병은 도덕적 통합의 파괴, 즉 인격의 중심의 이탈이다. 위선은 이탈을 조장함으로 우리의 중심을 좀먹는다. 도덕적 일관성을 상실하고, 깊은 차원의 중심에 있는 영의 치유적 능력과 소통하기보다는 단절하게 된다.
최근에 Robert Cummings Neville (1939 출생)는 틸리히의 분석에 근거하여 죄를 존재론적 자기모순 (ontological self-contradiction)이라고 묘사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규범적 계약(normative covenant)의 관계 속에서 창조하셨으므로, 그 계약을 거스르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거스르는 셈이 된다. 계약에 충실한 삶은 이웃이나 자연을 해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악을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런 삶은 위선을 피하는 삶이고 하나님과 더 신실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고, 도덕적 일관성을 유지함으로 더 중심 잡힌 인격의 온전성을 구현하는 삶이다. 키에르케고르의 “ 심정의 순수성은 한 가지를 원하는 것이다” (purity of heart is to will one thing)이라는
말은 유명한데, 여기서 한 가지는 선을 말한다. 오직 선 안에서만 우리는 진리와 진정성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함으로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성취할 수 있다. 한 가지만 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영어 단어 will은 명사와 동사로 사용되는데,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위를 다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선을 원하는 것은 동시에 영원과 진리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원하는 것이다. (It is to will as God wills.) 즉 하나님을 위한 선택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와 그의 청자들은 유대교의 계약 전통, 특히 모세의 계약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은 자아의 온전성과 도덕적 진정성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와 맺은 계약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석적 관점
▶ 기독교인이 이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이슈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육체적 거룩함이란 관념은 오늘날의 종교에 대한 이해와는 낯설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제의적 정결이나 거룩함에 관한 많은 율법을 포함하여 레위기 19:2의 말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을 따르고 있다. 성경에는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율법이 없지만, 제사장들은 제단에서 일하기 전에 손과 발을 꼭 씻어야만 했다(출30:17-21). 제단에 바쳐진 희생제물의 거룩한 고기를 먹기 전에도 씻어야 했다. 바리새인들은 출19:6의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말씀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과 같이 거룩해야 하고, 그러기에 모두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마가가 3절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따랐다고 하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규례를 무시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 현대의 성경 번역에서 2절의 손을 수식하는 형용사를 번역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헬라어 koinos가 자체로 ‘ 부정한’ ‘ 더러운’ 이란 의미가 없고 ‘ 평범한’ ‘ 일반적인’ 란 뜻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보통 손이 아닌 성화된 손으로 먹어야 한다고 믿었다. 중요한 전환이 14절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제의적 정결에 대해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예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에서 예언자적 전통을 끌어들이고 있다.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제의적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윤리적 행동을 통해서 가능하다. 비슷하게 예수는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음식 규례를 꼼꼼하게 지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도덕성을 통해서라고 선언한다. NRSV성경의 15,18,20,23절에서 ‘ 더럽히다’ (defile)라고 번역한 동사는 형용사koinos에 근거하는데 그것의 뜻은 “ 평범하게 하다” 즉 보통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정결례 논쟁에서는 그것은 “ 성화되지 않게, 거룩하지 않게” 라는 뜻이 된다. 레위기에서 “ 부정한” 이란 것은 제의적으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씻음, 희생제사, 또는 단순히 밤까지 기다려 하루를 보냄으로써(레11:24) 교정되어야 할 상태이다. 심지어 합법적인 결혼한 사람들의 성교도 남편과 아내를 부정하게 만들기에, 목욕을 통해서 그들의 부정을 제거해야 했다(레15:18). 물론 이러한 부정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의적 정결의 면에서는 이러한 부정이 제거되어야만 했다.
▶ 15, 18-19에서 예수는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레위기의 전체적인 프로그램을 거부하는 듯 보인다. 사실 이것은 마가가 예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그의 이방인 독자들을 위하여 “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19b)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했다” 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예수가 그렇게 과격하게 말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예수가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할까? 아마도 예수는 다른 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한 문제를 평가절하하는 방식을 끌어들인 것이다. 여하튼 예수의 핵심적 주장은 명확하다. “ 진실로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하게 되는 것은 그(그녀)에게서 무엇이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가 진짜로 하나님에게 중요하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입으로 나오는 것의 대조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거짓말이나 욕설, 중상 그리고 거짓 약속과 같은 입으로 지은 죄들에 관해 강조하시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 그런데 21-22절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목록 중에서 악의와 사기 둘만 입으로 짓는 죄이다. 대신에 입으로부터 마음으로 즉 나쁜 생각들로 초점을 옮긴다. 예수는 여기에서 생각이 행동의 아버지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 전에 무엇을 생각한다. 21-22절의 악한 행동의 목록은 표준적인 것인데 적어도 10계명의 4계명과 조응한다. 이 목록과 바울이 갈 5:19-21에서 “ 육체의 행실” 이라고 말한 목록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마가의 목록에서 빠진 것이 단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마시는 놀음 같은 육체의 행실 뿐만이 아니라 원수맺음, 다툼, 시기, 분냄, 분쟁, 분열 파당 같은 정신의 행실 같은 것도 있다. 바울의 리스트에 빠져있는 마가에 있는 두 항목이 탐욕과 교만임이 놀랍다. 이것은 둘 다 기본적으로 행동이라기 보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번역된 헬라어 pleonexia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 이다. 왜 더 가지려는 것이 죄가 되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가난한 자들에게 인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눅12:15에서 “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pleonexia)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마가의 목록에서 자유로운 우리들도 이 충고가 필요하다.
‘ 교만’ 이란 단어는 NRSV에서 오만(arrogance)이라고 번역했다. 다른 영어번역본에서는 ‘ 거만함’ (haughtiness)이라고 번역한다. 오만은 영혼의 질병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요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기독교인들은 벧전5:5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목회적 관점
어느 일요일 아침에 나는 내 사무실에서 누군가 급하게 써서 내 책상 위에 놓고 간 메모를 보았다. 메모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 우리 청년들이 성경을 아는 것만큼도 맞춤법을 모르는 것 같군요.” 나는 내 사무실 출입문으로 갔다. 거기서는 새로 만든 게시판이 잘 보였는데, 그 게시판은 주일학교에 새로 나오는 어린이와 어른들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밝고 유쾌한 색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 주일학교! Sunday Skool!”에 초대했다. 나는 이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웃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먹혀 들었다. 나는 조금은 즐거웠지만, 또한 화가 났다.
게시판을 만든 청년들이 자기들의 토요일의 한 부분을 희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학교의 새 학기를 환영받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책상 위에 메모를 남기고 간 사람은 더 깊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놓치고 있었다. 오늘 마가의 본문에서 나는 예수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의롭다는 옷을 입고 예수와 제자들이 쉬고 있을 때 찾아왔다. 제자들은 함께 모여서, 먼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지도자인 예수를 보고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5절). 만약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대신해서 화가 나지 않았다면 이상할 것이다. 어쨌든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 왔다. 어떤 이는 가정을 포기했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경력을, 또 다른 이는 그들의 지위를 포기했다. 그것들은 토요일 오후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예수의 응답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예수는 이사야를 인용해서 말한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6-7절).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끼기 위해 질서가 있는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를 조직하는 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연결시키는 교리가 필요하다. 질서와 교리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질서감을 예배하거나 교리에 절하기 시작하면 우리 창조자에게 신실하지 못하게 된다. 예수의 동시대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제의적으로 정결한지 부정한지, 순결과 오염 같은 세부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이런 관심에서 나오는 실천이 생명을 살리는 것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세기에 제의적인 정결함을 요구하는 것은 또한 심판과 억압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예수는 이 기회를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칠 순간으로 택했다. 그는 무리를 자기 주위에 모으고 말했다. “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14-15절). 사람들은 이 선언을 듣고 당혹했다. 예수는 그 시대에 기본적인 종교적 믿음에 도전하고 있었다. 제자들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예수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예수는 하나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하셨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의 위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위에서 음식은 필요한 곳에 사용되고 하수구로 나간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성령훼방, 방탕, 악한 시선, 모독, 교만, 어리석음” (21-22절)이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는 1세기의 세계관이나 제의적 정결이나 부정을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경고한 나쁜 생각보다 우리가 나을 건 없다.
오늘 우리의 도전은 어떻게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오해하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노숙인의 더러운 손톱을 보고 “ 저들은 우리의 교회 교인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예배 시간에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 생각하거나 옆에 앉은 사람에게 속삭이기를, “ 예배시간에 아기는 데려오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라고 하지 않는가? 동성애 커플이 교회에 온 것을 보고서 “ 저들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해” 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우리 자신의 삶을 더럽히는 죄를 검증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우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남아있게 하는 데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는 이천 년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살인자들과 우리의 도둑들과 우리의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을 가둘 만큼 충분히 신속하게 감옥을 건설할 수 없다.
결혼과 가정은 간음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우리는 강한 탐욕 avarice 이나 무법 licentiousness 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문제가 되는 욕심 greed 이나 성적인 억제력의 결핍 lack of sexual restraint 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는 그 옛날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단지 하수구로 버려지는 것인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우리가 종교적인 규칙을 잘못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시킨다. 주일학교의 정확한 맞춤법은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사람을 환영한다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죄를 직면하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죄들을 마주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떠나 보내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면,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고 식탁에서 환영받게 된다.
설교적 관점
-오늘날처럼 종교간 대화와 상호이해가 개인이나 국가 모두의 발전에 필수적일 때, 설교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에게 말한 것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지 않은 것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비난하거나 1세기
유대교에 있어서 그들의 중요한 역할을 공격한 게 아니다. 정결예식에 관해 예수와 논쟁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소한 것에 사로잡혀 있었던 속 좁은 지도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 이유는 손을 씻는 예식은 유대교 신앙과 정체성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논쟁에 개입할 때 그 자신 깊은 종교성을 지닌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예언자 전통에 서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기적인 점들을 공격한다 (사 29:13). 예수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지적하지만 유대교의 모든 지도자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룹을 설교하거나 언급함에 있어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와 다른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 이 본문을 오늘에 비추어 생각해볼 때 적어도 2가지 중요한 문제가 일어난다. 첫째로 우리 자신의 신앙과 전통에 있는 “ 마음” (the heart)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 마음이라는 단어를 7:1-23에 걸쳐 세 번씩이나 사용하고 있고 각각의 경우 종교적인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이 중요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마음은 한 사람의 의지와 의사결정에 있어서 중심에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거나 (7:6b) 나쁜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 (7:21)은 통탄할 만한 죄였다. 3:5, 6:42 그리고 8:17과 같은 구절들 또한 마음이 완악해진 것은 이웃을 향한 연민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가장 비난받을 만한 영적 상태중 하나라고 보여주고 있다. 이 곳 저 곳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이웃의 더러운 손보다 우리 자신의 더럽혀진 마음을 성찰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우리 신앙의 “ 마음” 을 생각하면서 7:21-22에 인용된 악한 생각과 행위들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짓기 쉽고 이 목록에 나온 죄들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범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 예수께서 거명하는 태도와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 있는 마음을 뜻한다. 이것들은 또 타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어 개인적인 죄는 사회적 결과를 초래한다. 악한 생각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밖으로 확산되면서 파괴적으로 된다. 만일 우리 신앙의 마음(중심)을 성찰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연민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악한 행위와 생각의 목록과는 대조적으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써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는 대안적인 태도와 행동 목록을 제시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우리가 지닌 거룩한 습관과 실천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적 실천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것들을 추구하는가? (혹은 우리가 추구하지 않는 신앙적 실천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정결한 것 혹은 부정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종교적 실천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우리 신앙을 표현할 때 “ 거룩함” (holiness) 혹은 “ 더럽혀짐” (defiled)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 실천” (practices) “ 가치” (values), 그리고 신앙적 삶을 격려하는 "영적 훈련" (spiritual disciplines)에 있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종류의 예전적인 행동이나 실천이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의미있는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 성수주일, 자선행위, 예배출석, 개인기도, 봉사활동, 친절한 접대, 용서등의 실천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느끼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이 본문은 신앙적 실천의 목적뿐 아니라 잠재적인 위험까지도(potential pitfall)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신앙적 실천의 목적이라는 면에서 매일매일의 습관 (종교적 혹은 그 밖의)이 하나님을 알게하고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타인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잠재적인 위험이라는 면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평가하거나 혹은 평가하지 않는다. 신앙적 실천이 일상화되어서 그 의미나 가치를 잊고 지내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혹은 우리
태도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 잘 모를 수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도덕적 엄격성이나 영적인 자기만족 혹은 나쁘게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 예수의 말씀이 어렵거나 혹은 도전을 주더라도 거기에는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새롭게 하여 우리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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