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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7장 24 ~ 37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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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을 전통적으로 (1) 하나님이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과 (2) 종교적으로 국외자인 두 이방인들의 믿음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의 구원의 능력에 중점을 두어 해석해왔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이 강조되었다: (1) 믿음의 능력은 종교적 울타리를 넘어선다. (2) 예수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과의 계약 밖에서 태어나 이방인인 자들 중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한다. (3)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은 항상 선민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적 경륜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무한성을 증거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제국이 진정 보편적이라는 주장을 초월하고 무효화시킨다는 것이 마가의 정치적 메시지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해 전통적이지는 않지만 조금 위험한 해석을 하고 싶다면 다음을 고려해보자: 위선에 관한 가르침 이후에 등장하는 오늘의 본문을 예수의 추종자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부족함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예수가 이미 이방인들을 치유하신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 (5) 상황에서, 예수가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매우 심한 말로 이방 여인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의 일종의 회심의 순간이 아닐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에서 예수가 잠깐 당신의 사명을 잊었다가 이 여인을 통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자각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그렇게 본다면 이 여인은 단지 설득력 있게 말 잘하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예언자인 셈이다. 이 여인은 예언자 이사야 ( 49:6)의 화신이다. 그녀는 예수를 꾸짖고, 곧게 하고 개방적이 되게 한다. 그 뒤에 나오는 귀먹은 자에 관한 이야기는 개방성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개방하는 일을 하게 되는 예를 보여준다.

여성신학자들은 오늘 본문(마태 15:21-28도 같이 고려하여)을 전통적으로 잘못 해석해 왔다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지적했다. Mary Ann Tolbert는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 아니고, 이 여인의 (가정의 대표인 남자가 아닌 여자가... ) 문화적 관습을 어긴 (혹은 염치없는) 요청이 예수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이방여인이 유대인 남자인 예수를 깨우쳐서, 바로 전에 예수 스스로가 추종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교훈, 즉 사회적 관습이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상기시킨다.

Sharon Ringe Tolbert와는 다른 방식의 제안을 한다. Ringe는 두로 지역의 부유한 이방인과 그 지역의 유대인 농민과의 정치적 불균형성에 관한 예수의 비판이 이 이야기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잔치 자리에 당연히 앉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밥상 아래에서라도 참여할 수 있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이것이 그들이 치뤄야 할 값비싼 제자도(costly discipleship)”이다. Gail O’Day는 마태복음의 평행구절을 분석하면서 예수와 당돌한 여인 간의 상호성이 이 이야기가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예수를 변화시킨 것은 예수를 정면으로 대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던 이 여인의 용기였고, 이는 예언자 전통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공의를 회복시켜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본문을 예수의 회심으로 해석하는 데는 몇 가지 신학적인 문제가 따른다. 예수가 신적인 존재라면 어떻게 회심을 경험할 수 있는가? 예수에게 뭔가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죄가 아닌가? 우리는 신약성서 (특히 로마서, 빌립보서, 히브리서)나 니케아 종교회의 등의 완전한 신, 완전한 인간 (fully God, fully human)”의 주장에 얽매여서 오늘 본문이 내포하고 있는 심오한 신학적 긴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완전한 인간이면서 죄가 없을 수 있는가? 앞에 나오는 위선에 관한 교훈과 연관시켜본다면 예수는 여기서 스스로의 위선의 문제에 직면하여 고통스럽게 자기 진정성(self-integration)을 구축하기 위해 하나님 안에서 중심을 잡아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닌가? 다른 말로 한다면, 마가는 성육신이 식은 죽 먹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메시아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본인의 실존적 한계성 자체 때문에도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더 나가,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가 완전한 신이라면, 예수는 이 고통을 회피할 수도 없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결합된 에바다 기독론(Ephphatha Christology),” 즉 예수는 완전히 열릴 때만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마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에게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이었고,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예수와의 대화에 참여할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노숙인이 미국 대통령의 만찬에 끼어들어서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당시의 풍습이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예수에게 다가갔다. 관례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그녀의 딸의 생명을 필사적으로 염려했다. 그녀는 예수에게 절을 하면서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사정했다.

우리는 우리의 친절하고 사랑 많으신 예수님이 물론 내가 너의 딸을 구해주겠다고 할 것을 기대하지만, 막상 예수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당황하게 만든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 예수는 이 절망에 빠진 여인에게 자신의 사명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그녀를 개라고 부른다. 어떤 주석들에서는 라는 단어가 그 발음처럼 거친 단어가 아니며, 예수는 다만 그녀를 애완동물처럼 부르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단어는 이고, 개라는 말이 예수가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비굴해지거나 자신이 작고 보잘 것 없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겠지만,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대담하게 응답한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 예수가 가진 초기의 편견은 대단히 인간적인 것이고, 지금 보여주는 통찰은 신적인 것이다. 그는 즉시 그녀의 도전을 이해했다. 그의 사명은 유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장벽을 넘어서 확장된다. 그녀의 뻔뻔함을 꾸짖기보다, 예수는 그녀에게 말한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에 네 딸에게서 나갔다.”(29)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 역시 치유에 관한 것이다. 언어 장애를 가진 청각장애인이 예수 앞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그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 그를 고쳐주기를 간청했다.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1세기에는 단순히 명확하게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데 관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체장애를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시각장애, 청각장애 혹은 지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설 곳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 그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사회단체와 종교 단체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다른 것을 두려워했고, 오늘날처럼 기형아 출산을 이해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실 때, 그들의 신체적 문제만을 바로 잡으시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을 공동체에 회복시키셨다.

예수는 이 사람의 질병 너머를 보셨다. 예수는 그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치를 보셨다. 예수는 그 사람을 무리에게서 멀리 데리고 가셔서 자신의 손가락을 그 사람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 사람의 혀에 대셨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열려라”(33,34)고 하셨다. 그러자 곧 그 청각장애인은 명확하게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그를 고통의 결박에서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그의 공동체에 다시 연결시켜주었다. 예수가 병을 고칠 때는, 귀신들린 소녀건 한센병 환자건 혈루증 여인이건 청각장애인이건, 예수는 몸을 회복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와의 단절도 역시 회복시켜 주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서 나를 높이고 나에게 가치를 부여하라고 우리를 압박하는 깊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1세기에는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고아,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 외국인,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아주 열악한 상태에서 살아야 했다. 정신의학과 의사의 소파에 누워서 프로이드를 읽는 것으로는 우리의 불안감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21세기에는, 공허하고 학대받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잊혀지고 사랑받지 못해서, 이 입양가정에서 다음번 입양가정으로 옮겨 다니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와 다른 종교의 죄수들은 눈을 가리우고 모욕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자들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와 특권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노페니키아 여인은 무한한 동정과 자비의 사명으로 예수를 초대한다. 신약학자인 Mitzi Minor는 마가가 이 이야기들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말해주고 있다고 썼다. 예수의 행동들은 그 마음이 악마에게 삼켜진 가치 없는 이방 소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쓸모 없는 청각장애인이 사실은 용납되고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인간의 신실한 응답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외적인 장벽도 없다는 인식을 요청한다: 인종, 계급, 민족성, , 나이 혹은 신체조건 등. 결과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도 역시 그런 장벽은 없어야 한다.”(Mitzi Minor, The Spirituality of Mark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6), 51.)

아마도 노숙자가 뭔가를 부탁하려고 미국 대통령의 만찬에 끼어든다면 부탁할 게 너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마른 손과 들리지 않는 귀와 괴로운 마음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거나 다른 사람들과 갈라놓는 장벽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인간성을 요청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이 아니다. 신분은 우리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이고 하나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갈라놓는 벽이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사랑과 자비가 자유롭게 흐를 것이고, 그리고 모든 사라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고 여겨질 것이다.

 설교적 관점

-이번 주 복음서 본문에 들어있는 2개의 이야기는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선포함에 있어 힘을 실어준다. 2개의 이야기 모두 놀라운 치유사건을 보여주지만 설교자에게는 이 또한 도전이 된다. 예수와 시로페니키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의 탄원에 모욕적으로 대응하는 예수의 모습에 혼란스럽다. 또 귀먹고 말못하는 사람을 고친 후에 예수는 그 사람과 친구들에게 치유사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흥미를 자아내는 상세함도 있고 각각 설교를 해도 충분한 도전적인 요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하여 특별히 두 가지 풍성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 2개의 본문에 대한 하나의 접근방식은 두 이야기가 가진 공통점을 찾아보는 일이다. 먼저 두 이야기 모두 이방인 지역에서 발생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민족적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보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도전을 주는 데 그것은 우리도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과 인종적 경계를 넘어 함께 예배하고 사역해야 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역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 평화, 치유를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야 함을 확증하고 기대하게 한다. (예수의 이방사역에 관해 막 8:1-6, 5:1-20을 보라)

이 두 이야기의 두 번째 공통점은 치유받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어린 소녀는 그 어머니가 그녀를 대신하여 탄원함으로써 귀신들림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귀먹은 사람은 친구들이 예수께 데리고 왔고 그들은 치유를 간청한다. 이 이야기들에서 치유를 받게 된 것은 장애인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적극적인 믿음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얻는 교훈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움과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회복을 구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이야기 모두에서 우리는 육체적 치유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보고있다. 우리는 귀신들림에서 치유받은 시로페니키아 소녀만을 보고있는 게 아니고 깊은 변화가 예수 안에서 일어났음을 인식하고 있다. 즉 예수는 마음의 변화와 이방인 사역에 관한 방향에 있어서 전환을(shift) 경험한다 (단지 7:31-37뿐만 아니라 8:1-8 4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통해서도).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인 사람이 듣고 말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막고 살아왔던 우리들을 향한 희망의 복음을 듣게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관해 설교할 때 다루기 곤란한 것들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가 그 이방여인과 그 딸을 개들” (dogs)이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예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의 앞에 있던 논쟁에서 (7:1-23)너무 지쳐있어서 그랬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 단순하게 예수는 이방인들보다는 유대인들에게 사역의 초점을 두고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만족스러운 답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설명은 가능할 수 있다. 즉 두로(Tyre)지방의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 지주들의 착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예수가 알고 있기 때문에 시로페니키아 여인에 대한 거절은 이런 상황을 반영했을 것이다라는 설명이다. 어쨌든 예수의 치유능력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예수를 놀라게 한다. 그 믿음은 예수의 고향사람들을 포함한 자신의 백성들보다 더 큰데 그것은 고향에서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능력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6:4-6)

그래서 7:27에 나타난 예수가 모욕을 준 충격적인 내용을 다루는 설교는 또 7:28의 여성의 대응이 지닌 충격적인 면을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인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첫 번째로 하는 예수사역의 우선권을 받아들이지만 여기에 머물러있지 않고있다. 여인의 믿음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라는 보다 큰 비전을 제시한다. 예수는 즉시 여인의 말에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알아차리고 마음을 바꾸어 그녀가 한 말을 칭찬한다 (마태복음 15:28과 비교해보라. 여기서는 말한 것이 아닌 믿음이 칭찬을 받는다). 여인의 말을 통하여 예수는 자신의 비전과 사역에 대해 단순히 다시 생각만 한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예수께서 여인이 원하는 바를 축복하고 그 딸을 치유한데서 보듯 이 대화를 통하여 예수의 능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결과정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거나 응답하지 않는 게 아니고 긍휼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혼란스런 부분은 예수께서 치유된 사람과 그 친구들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7:36)명령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들이 앞으로 있을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어서 이들이 말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말이 때로는 불필요하다고 이해했을 수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 신앙을 나누는데 있어서 꺼리곤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행동이 말로하는 것보다 더 크게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든지 아니면 말이 지닌 불충분한 면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볼 수가 있다. 혹은 우리가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실수하거나 소외시킬까봐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치유받은 사람과 그 친구들은 하나님의 현존과 그들 가운데 일어난 능력을 증거한다. 두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목격한 하나님의 자비, 사랑 그리고 진실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 맞추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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