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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6장 14 ~ 29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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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성서적 비극? 세례 요한의 비극적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갖고 있는 매력적 요소 (성적 욕망, 유혹, 정치적 야망, 추문, 살인 등의 요소가 혼합) 때문에 그 신학적 의미와는 별도로 수많은 화가, 작가, 음악가 등에 의해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화가: Titian,
Caravaggio, Gustave Moreur; Oscar Wilde는 Salome라는 희곡을 썼고, Richard Strauss는 그것에 근거해 오페라를 작곡했고, Ken Russell과 Billy Wilder가 영화로 만들었음)
  이 이야기는 그리스나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유사한가? 예술가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신학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대 헤롯의 유약한 아들인 헤롯은 이 이야기의 주역이지만 비극적 캐릭터로 여겨지기에는 충분한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살로메는 그의 분노한 어머니의 꼭두각시에 불과해서 비극적 장르의 중심인물이 되기에 부족하다. 헤로디아의 복수심은 ‘ 비극적 결함 (tragic flaw)’ 으로 여겨지기에는 충분하지 못 한 점이 있다.
  요한의 경우, 진리의 선포자라는 직분과 금욕주의적 삶의 방식이 비극적 주인공이 겪어야 하는 난관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비극은 성서적 개념은 아니다. 성서의 전통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타락 (문자적이 아니고 실존적인 의미에서) 이후, 즉 인류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속한다. 비극이 아니고 비애(파토스)가 인간이 처한 조건이다. 그러나 비애도 이야기의 결말까지 유지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애처롭고, 혼란스럽고, 복잡한 인간의 감정과 분투의 영역에 침입하여서 결말은 항상 비극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Reinhold Niebuhr가 ‘ beyond tragedy’ 라는 표현을 사용했음)
  중대한 대결: 진리냐 권력이냐. 이 이야기의 진짜 중요한 주제는 죽음, 애증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쉽게 자극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권력과 예언자적인 믿음의 대치이다. 가장 중심 되는 갈등은 세례요한과 왕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이 갈등은 복잡한 양상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흑백이 명확히 갈리는 흔한 종교적 이야기나 대중 소설과는 달리 이 이야기에서는 선과 악, 빛과 그림자가 이 극의 중요한 인물 안에 섞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헤롯의 경우를 보자. 그는 전형적인 악한과는 다르다. 그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 희망의 기억의 흔적’ 같은 것이 있어서 세례요한의 증언 속에 인간에 관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인생은 과대망상증과 욕정의 지배를 강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오래된 좋은 기억은 작용을 하지 못했다. 헤롯은 바울처럼 (롬7:21-24)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과 악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병존하고, 자신은 곤고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했을 수도 있다. 
    왕과 예언자의 만남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그 자신의 잘못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 예언자는 왕이 극복해야하는 유혹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들의 만남은 구원적 만남이 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결점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는데, 그것은 헤롯의 만족할 수 없는 최고에 대한 욕심이었다. 그는 그것을 갖고, 지키고, 과시하고 싶어 했다. 성적 욕구보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오늘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이다. 오늘 이야기에 성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은 “ 권력은 가장 성적인 것이다. (Power is the ultimate aphrodisiac.)” 라는 키신저의 말을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다.
  그런 권력은 진리에 저항한다. 우리의 작은 과오와 죄책감을 노출시키는 진리 뿐 아니라 권력이 감추고자하는 만고불변의 진리, 즉 까뮤가 말한 “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신이다. (Men are unhappy gods.)” 라는 진리에 저항한다. 예언자적 믿음이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 인간의 지배권 과시의 부조리성 (absurdity of our pretence to sovereignty)” 이다. 기독교가 비극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비극적 인간론의 전제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의 과오로 최종적인 결말을 확정지을 정도로 똑똑하거나
유능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주가 모든 생명의 최종 운명을 결정한다. 
 
 주석적 관점 
 
▶ 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복음을 듣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와 같이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세례요한은 폭력적 죽음을 당했는데, 그가 살아온 방식의 직접적 결과이기도 하고, 그를 살려줄 수 있는 통치자가 정의와 진리보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이익 그리고 오만에 의해 행동했기 때문이다. ▶마가가 이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는 위치가 시사적이다. 열두 제자의 사명에 대한 설명(6:7-13)과 오천 명을 먹인 사건(6:30-44)의 중간에 있다. 앞의 본문에서는 제자들은 예수의 통치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위임받고 능력을 받는다.
뒤에서는 제자들이 첫 번째 사명에서 돌아오고 예수는 오병이어를 축복하여 오천명 이상을 먹이신다. 세례요한이 말한 위대한 이가 여기에 있다 (1:7; 신18:15-22; 왕하4:42-44; 시37:18-19;81:10;132:15; 사49:9-13). 마가는 두 인용사이에 헤롯안티파스의 예수의 정체성의 물음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과(6:14-16) 헤롯의 포로됨(6:17-20) 그리고 세례요한의 처형(6:21-29)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얼핏보면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긴 설명은 마가의 예수의 이야기의 흐름과 맞지않은 것처럼 보이지만(막14:1-12;눅9:7-9참조), 마가가 이곳에 이 이야기를 배치한 것이 예수의 정체성을 좀더 드러내고 충실함의 댓가를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고찰(14-16).
헤롯과 그의 신하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일과 기적에 대해 보고받으면서 예수의 이름과 명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14). 놀랍게도 그들은 예수의 권능이 유대교에서 높이 평가 받는 근래와 옛 선지자의 부활(6:14-15;8:27-29)에서 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헤롯 안티파스는 굳건한 헬라주의자였고 충실한 유대주의자들에게 종교적 관습을 경멸하는 면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기에 그는 충실한 유대교인들이 의식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옛 무덤 자리에 수도 티베리아스를 건설했다(민19:14-22). 많은 유대인들이 그 곳을 회피했지만 헤롯은 수도에 이방인과 엘리트 그리고 유대교를 신봉하지 않는 유대인들로 채웠다. 헤롯과 그의 신하들은 헬레니즘의 다른 신앙적 전통으로 예수의 권능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본문처럼 그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이스라엘인의 삶과 전통에 의거했지만(14-16,20), 그들의 예수의 권능에 대한 평가는 독특했다. 어떤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종교적인 사람들이 새롭고 육체적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보았는데 하지만 부활은 최후의 날에 오는 것이다(겔37:24-29;렘33:15). 그런데 유대교 밖에서는 현 시대에서 부활한 사람의 권능이 더 커진다는 종교적 믿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헬라의 아스클레피우스나 테베의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오시리스 숭배는 영웅의 죽음이야기(때론 영웅의 육체분할)에 근거하고 있는데, 기적적인 육체적 생명의 회복과 부활한 영웅의 현세에서의 위대한 권능의 행사들의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비유대적 전통들은 헤롯과 그의 신하들의 고찰에 보다 적절한 해석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예수의 대한 평가가 전적으로 유대적으로
보이더라도 그들은 유대교의 경전과 전통보다는 많지는 않아도 그만큼이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세속적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헤롯과 그의 신하들이 예수와 세례요한 간의 관계(1:1-11)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도 중요하다. 더구나 헤롯자신의 죄책감과
두려움도 분명히 예수의 정체성과 그의 권능에 관한 그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20,26). 

 
▶세례요한의 죽음(17-29)
마태(14:1-12)나 누가(9:7-9)보다는 더 정교하게 마가는 교만하고 불충실한 왕, 복수심에 타는 아내, 추종하는 딸, 솔직한 주님의 예언자에 대해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짧은 세례요한의 “ 고난이야기” 가 만들어졌는데(24-25), 이는 예수와(15:1-32) 제자들(13:9-13)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전조가 되고 있다. 세례요한의 죽음이 헤롯 안티파스의 명령으로 된 것은 예수의 죽음이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15:1-5)에 의한 것과 공통적이다. 두 통치자가 포로로 잡힌 두 유명한 종교적 인물에 대해 똑같이 호의를 가졌다.
두 사람 모두 포로를 살려주길 원했고, 법을 집행하기 전에 지지자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둘 다 그들의 나은 판단에 반해 행동했고 죄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마침내 그의 제자들이 무덤에 안치했다.  
분명히 처음 듣는 사람이나 복음서의 독자들은 이 연관성을 모르겠지만, 마가는 이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고난을 준비하고 있다(8:31;9:31;10:32-34;10:45;13:1-15:47).
마가는 또한 예수와 세례요한의 정체성과 사명을 연결시키고 있다. 제자들의 사명(6:7-13)과 예수의 오천 명을 먹이신 일(6:30-44)은 예수의 메시야적 정체성과 사명의 맥락에서(1:1-11;11:32;15:39) 세례요한의 예언자적 사역을 보는 렌즈를 형성한다. 
마가가 헤롯 안티파스를 ‘ 왕’ 이라는 직책으로 독특하게 부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마2:1,3 눅1:5). 오로지 대헤롯만이 로마황제로부터 왕이라는 직책을 수여받았는데, 헤롯 안티파스가 헤로디아의 강권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그 직책을 요청하자마자 그는 해임되고 유배당했다. 마가가 그 직책을 사용한 것은 지역적 관습이거나 실수일 것이다.
마가는 아마도 그가 원한 직책을 따지 못하고 그의 왕국도 잃어버린 헤롯 안티파스를 조롱하기 위해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마가는 물론 교만과 질투 잔혹함과 죽음으로 대표되는 지는 헤롯의 왕국과 비록 죽음에도 불구하고 용기있는 충실함과 생명 풍성한 친교로
대표되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주관한 떠오르는 하나님의 왕국을 날카롭게 비교하고자 했을 것이다(1:15; 6:7-13; 6:30-44; 15:2,26 등). 
     
 목회적 관점 


회이 구절에서 헤롯 자신이 놓여 있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딜레마를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의 가정 및 사회에서 수많은 복잡한 관계를 처리하려고 할 때,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의 기준을 유지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세례 요한을 둘러싸고 자신의 아내와 불화했고, 그의 아내 때문에 세례요한과 불화했다. 그는 갈릴리 사회에서 관대하고 신뢰할 만한 지도자로 인정받기를 갈망했지만, 그의 딸이 요한의 처형을 요구하는 바람에 난처해졌다. 요한에 대한 헤롯의 관계는 두려움, 곤란, 자기 방어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헤롯은 어떻게 사회적인 인식이 사람의 인생의 가능성을 형성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그가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안내해 줄 진리를 찾고 있었다. 그는 관계라는 거미줄에 묶여서 자신을 인생이라는 연극의 “ 배우 actor”가 아니라 “ reactor”가 되게 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때때로 교회 정치라고 하는 끈끈한 거미줄에 묶인 파리처럼 허우적거린다. 교회에서 응접실 카페트를 어떤 색으로 할 것인지와 같은 신학적으로 세속적인 쟁점과, 교회 예배의 형태를 어떻게 할 것인지와 같은 신학적으로 핵심적인 쟁점들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끼리 충돌한다. 지도자들이 이런 쟁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잘 타협하느냐에 대한 공동체의 인식이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목회를 잘 하도록 지원할 수도 있고 약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적이고 능력 있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거룩하다고 여겨 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하나의 의제를 밀어붙이는 회중의 결정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체면을 유지하거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개인이나 단체가 요란스럽게 요구하는 일에 대하여 적어도 한 번은 항복을 했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이 관찰한 바와 같이, 종교 지도자들은 좋은 영적인 지도력이란 복잡한 상황과 혼란한 감정과 불안한 마음을 통제하는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러한  지도력은 신앙 공동체가 가져야 하는 더 깊은 신학적 반성을 방해하게 된다. 오직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고 갈등을 최소화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헤롯이 그의 생일잔치에서 겪은 뜻하지 않은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 헤롯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협상해야 할 사람들 때문에 헤롯이 겪었던 것과 같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딜레마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장아장 걷는 아기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엄마의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긴 하루의 끝에 반항하는 표정으로 “ 싫어” 라고 말하면서 식품점의 6번 통로에서 땡강부리는 아이를 가장 사랑하고 잘 양육하는 것일까?
세 아이를 둔 아빠의 경우, 출장 계획을 재조정해서 어린이 야구 플레이오프 경기에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것은 투쟁이다. 기업의 여성 임원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임신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그녀를 고용한 사람이 그녀를 유능한 상사라고 생각하게 될까 걱정한다. 전업 주부인 아빠는 그가 업무의 압박을 조절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전 동료의 속삭임과 싸운다. 청소년들은 바람직한 사회의 파벌에 가입하기 위한 경쟁, 미숙한 연애라는 복잡한 세계 안에서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가슴, 특권과 책임에 관한 가족들 사이의 긴장 등등 때문에 고뇌한다.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인기 장난감을 원하는 어린 아이들은  부모들의 부부싸움 때문에, 또 부모가 이혼할까봐 혹은 실제로 이혼해서 걱정한다. 또 자기가 바보라서 구구단이나 기초 문법을 배우는 것을 어려워할까봐 걱정한다. 전 연령대에 걸쳐서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이고, 인생이 그들을 갈등하는 방향으로 밀어 넣고 잡아당길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헤롯이 고군분투한 이야기에서처럼, 어떤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는 위태로운 생명들이 있다.
마가의 본문에서 가장 위태로운 인물은 세례 요한이다. 헤롯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한 고려보다 왕의 공적인 이미지를 선택했을 때, 세례 요한은 가장 큰 대가를 치렀다. 잘못된 신앙으로 인한 행동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의사 결정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붕괴시킨다. 의료비용 삭감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결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대안도 마련하지 않은 채 공공의료원을 폐쇄하면, 유아들이 죽는다. 한편, 국가 부채가 화폐 가치를 침식하고 물가를 인상시킬 때 많은 노동자 가정은 수입과 지출을 맞추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들이 건강 보험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그들의 자녀들 또한 취약하게 된다. 군사동맹은 군인들을 본국에서의 지원이 미약한 분쟁지역으로 끌고 들어가서, 원로들이 한 약속 때문에 젊은이들이 위험에 처하도록 한다.
반대로,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군대가 그들을 대신해서 개입하지 않으면 민족주의적인 “ 인종 청소” 의 결과로 죽을 수 있다. “ 나쁜 신앙” 에 근거한 의사 결정은 헤롯왕의 이야기와 동일시하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이야기를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맥락에서 읽어서 헤롯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 자신의 결정을 동일한 이야기의 빛에서 읽고서, 우리가 내린 결정이 자기 방어적인지 아니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로서 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도록 도전한다.
헤롯 역시 이 이야기에서 위태롭다. 그가 요한과 대화할 더 이상의 기회를 파괴하도록 결정함으로 그의 영적인 탐구는 끝이 났다. 요한에게 사형선고를 한 그의 죄는 그를 또 다른 유대 교사로 부각된 예수를 요한이 부활한 것이라고 상상하게 했다. 아마도 그는 그가 회개하라는 요한의 메시지를 들을 두 번째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고 마침내 요한이 선포한 영적인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헛된 상상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영적인 탐구가 요구하는데 따라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과정보다 사회적인 안정과 균형을 선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기회를 찾고 있고, 그때 우리 자신이 지금보다 위기를 감수할 준비가 더 많이 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헤롯처럼, 깊은 슬픔에 잠긴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설교적 관점
 
-모든 이야기 속에는 비록 독자가 그 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거부되거나 수락되기를 기다리는 은혜의 순간이 있다. (Flannery O’ Connor, M y s t e r y a n d Manners, 118)  
“ 공포의 본문” (text of terror)을 설교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본문처럼 헤롯이 동생의 아내와 간음 (adultery)하고 그리고 세례요한을 투옥하고 처형한 사건같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직면할 때 우리 설교자들은 상세한 내용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그 이야기가 지닌 도덕적인 면으로 바로 나아가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게 하면 평범한 눈으로 볼 때 감추인 면 즉 그 이야기의 깊은 내면을 흐르는 은혜의 흐름 (stream of grace)을 보지 못하게 된다.
-마가의 기록은 평범한 것을 감추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평범한 눈으로 보았을 때 감추인 것은 악이 만연한 세상이고 이 악은 고통과 무질서를 가져다주면서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삶에 함께 존재한다. 어느 누구도 이 권세(power)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특히 죄 없는 사람과 약한 사람이 더 그렇다.  
-마가는 극단의 복음서(a Gospel of extremes)이다.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환영받고 또 기쁨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과 분명한 거절이 있다.
거기에는 중간 (neutral territory)이 거의 없다. 무관심의 영역이 들어설 방이 없다. 독자들은 생각할 기회를 거의 부여받지 못하고 행동으로 나아갈 것과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을 보고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듣도록 요청받는다. 
-악(evil)은 악마들에게서만 드러나는게 아니고 권력의 중심 (정치적, 종교적)에서도 나타난다. 섹스, 돈, 권력을 따라 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사람들 위에 “ 군림한다” (lord over).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무죄한 자와 그 반대편에 서있는 세상 곧 불의와 가혹한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요한의 제자들의 외침으로 끝난다. 즉 본문은 힘으로(power) 시작하고 무기력으로 (powerlessness) 마친다. 
-요한에 대한 헤롯의 반응은 분노, 두려움, 그리고 괴로움이 섞여있다. 이 혼란스러운 통치자는 요한을 평범한 눈에서 보면 감추어진 곳에 두기를 원한다[감옥]. 이 불안한 장소는 헤롯의 생일연회 때 전면으로 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다.
헤롯은 죄없는 자와 정치적 편의 [politically expedient, 약속을 지키는 일]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그의 선택의 순간은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기를 기다리는 은혜의 기막힌 순간 (palatable moment of grace)이다. 헤롯이 이 은혜를 거부한 일은 요한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분명히 이 본문을 덮고있는 죽음이라는 악취(stench)는 마가복음의 이후 이야기 즉  예수의 수난에서 있을 은혜의 폭력 (a violence of grace, 빌라도의 선택)을 보여준다.
요한의 설교는 혼란스러운 캐릭터인 헤롯에게 은혜를 제공한다. 빌라도처럼 그는 의롭게 행동할 수 없었고 악이 선을 지배한다.
- 마가복음을 설교하는 일은  일상적 현실이 악이라는 실체가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청중들로 하여금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 일상생활은 권력에 의해 통제되는게 아니라 보다 가까이에서 통제되고 겉으로는 중립(neutral)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마가의 이야기가 도움을 준다. 요한의 처형같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무감각을 깨뜨리고[중립] 통제되어 살고있는 우리의 세상 속으로 초월, 폭력, 은혜라는 생생한 이미지로 들어온다.   
-요한의 참수는 우리 자신의 비극적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예배는 때로 죽음의 악취가 성전에 스며들도록 창문을 열고 허락해야만 한다. 이 본문은 회중들이 어둠 속에서 슬픔에 머물면서 어느정도 기다려야 할 것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커튼을 잡아당기고 평범함 속에 가리워진 것을 즉 본문의 여백에 있는 생명의 향기를 앞으로 가져와야 한다. 이 순간 은혜의 현존이-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를 기다리면서-느껴질 수 있다. 이 은혜는 고통이나 악의 공포를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이 은혜가  괴롭고 비애감을 품은 채  받아들여질 때 생명의 향기가 성전을 채우고 예배는 신자들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예배는 고통에 대해 대충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또 거기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예배는 모든 일들이 새롭게 되리라는 인식 속에서 종말론적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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