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예수의 통치의 특징과 관련된 3째 주 본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예수의 왕권의 특징(what)과 그의 권위의 근원(why), 그리고 그 권위가 어떤 방식으로 행사되는지(how)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이 세 가지 종류의 질문에 대해 중요한 기독론적 의미를 추가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한 후 결론적으로 우리가 “ 예수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세 번 째 답: 예수는 영적인 영역을 통치하는 왕이다. 예수 고향 사람들의 놀람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몰이해는 예수의 권위의 근원(source)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는 그것을 완전하게 갖고 있고, 다른 이들은 결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절대적인 순종적 믿음(absolute, obedient faith)이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제자들처럼 (확장하자면 모든 인간처럼)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왕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일들을 이해한다. (“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2절)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복음서 기자에게는 너무 명백한 결론을 유추해내지 못한다. 그들의 질문은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출신을 알고 있는 자가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불신은 단순히 소극적인 장애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보이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의로운 신앙을 헤칠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단지 소극적으로 무시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척했다.
이 이야기에 깔려있는 신학적 교훈은 불편하지만 평범한 진실이다: 인간이 사회적 규준을 수호하고, 자신의 좋아하는 것을 신뢰하는 능력이 믿음의 능력보다 더 크다. 마가복음에서 사회적 규준을 초월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행동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이들은 부와 권력을 소유한 자(야이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혈루증 여인), 친구를 위해 희생적인 행동을 한 자(중풍병자의 친구들) 등으로, 특정한 사회적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수수께끼는 오늘 이야기 후반부에서 그 풀이가 나온다.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왕인가? 예수는 영적인 영역의 왕이다. (“ Jesus is king of the spirit realm.” ) 예수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스스로 수행할 사명을 주어 보내신다. 그 사명을 수행하는데 예수께서 “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 을 주셨다. 아무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권한을 줄 수 없다. 예수는 거라사에서(막 5장) 귀신을 쫓아내는 등 이미 영적 영역에 대한 그의 권위를 증명하였다. 이제 그 권위를 그가 선택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들은 그 권위를 받기 위해 (본문이 명백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믿음으로 나왔다.
예수가 이미 갖고 있지 않는 권위를 줄 수 없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의 성격(nature)을 쉽게 설명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었다는 것은 (commissioning of the disciples) 예수의 권위가 어떻게(how) 행사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예수는 왕적인 권위를 믿음을 갖고 오는 자에게 위임하신다. (Jesus delegates kingly authority to those who come in faith.) 예수의 권위는(what)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순종적인 믿음에서 나오고(why), 그의 믿음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그 권위를 기꺼이 나눠주신다(how).
여기에 본 훼퍼를 생각하게 하는 제자도의 신학이 등장한다. 우리는 13절에서 제자들이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을 그들의 성숙해진 신앙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믿음은 권위를 가져온다 – 그리고 권위는 책임을 자져온다 – 는 가르침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믿음의 은사를 행사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데, 이 권위는 우리가 복종하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선포하고, 치유하고, 악에 대해 승리를 선포하는 제자의 책임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삼주 요약: 예수의 왕적 권위의 본성, 근원, 행사. (The Nature, Source, and Excercise of Jesus’ Kingly Authority).
(1) 예수는 창조된 세계 질서에 대해 통치권을 갖고 계신다. 그는 이 점에서 창조주와 동급이다.
(2) 예수는 생명과 율법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는 생명을 주는 분 (the Giver of life), 치유의 근원, 율법의 저자로 이해된다
(3) 예수는 악한 영들을 지배하는 권능을 갖고 계신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그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위의 내용은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준다. 예수는 (귀신도 알고 있듯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의 권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궁극적 개방성(his absolute obedience and ultimate openness to the will of God)에서 나온다.
예수의 믿음은 가장 완전한 믿음이고, 거기에서 신적인 권위가 나온다. 이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되어 그의 권위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의 권위는 믿음을 갖고 오는 자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부드럽게 (지상 권력자의 거리를 두는 방식과 대조되게) 행사된다.
그의 다스림은 주변으로 몰린 사람들과 힘없는 자들을 보살핌으로 시작한다. 부자와 권력자들도 그의 다스림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근거로 어떤 특혜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끝으로, 예수의 왕적인 권능은 믿음으로 오는 자들과 자유롭게
나눔으로 행사된다.
주석적 관점
단락주제: 고향에서의 배척(6:1-6)과 열두 제자의 파송(6:7-13)
이 단락에서는 예수를 가장 잘 알아야 할 핵심제자들조차도(나중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나지만 8:27-33) 예수를 오해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제한된 관점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 귀향(1-3): 예수는 가버나움 바닷가를 떠나 훨씬 더 내륙 쪽인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처음 제자들을 불렀을 때 그를 따르라고 말했고(1:16-20), 열 두 제자들을 불렀을 때도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도록 했다(3:14). 이제까지도 모든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고 고향에도 따라왔다(6:1). 나사렛에서는 안식일에 회당으로 갔는데 이는 누가복음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한 가난한 자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는 설교하는 장면의 마가판이다. 그 구절에서도 예수는 고향사람들과 문제가 생긴다(눅4:16-30). 그런데 마가는 설교의 내용에 관심이 없고 고향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듣고 그의 가르침과 치유에 대해 놀랐다. 그들은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라고 물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라고 말하는데, 비록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마리아(어머니)의 아들로 칭하는 것은 ‘ 애비없는 아들’ 이라는 예수에 대한 모욕이다. 더구나 목수(tekton,나무를 다루는 노동자)라는 직업은 지혜와 치유를 행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가 아니다.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을 언급한 것은 예수가 타향사람들에 의해 훌륭한 설교자로 칭해질 수 없는 가문출신이라는 것을 잘 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단지 나무를 다루는 노동자가 비록 나사렛과 같은 작은동네에서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몫을 하긴 했지만 결코 위대한 일은 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예언자(4-6): 예수는 그들의 반응에 대해 유대와 그리이스 로마사회에서는 잘 알려진 “ 예언자는 자기 고향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6:4)는 격언으로 대답했는데 자기 친척과 자가 집을 첨부하여 말했다. 예수에 대한 불신은 그의 치유의 활동을 현저히 감소시겼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랐지만 단지 같은 고향출신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는 놀라셨다(6:6a).
그의 치유 사역 내내 특히 갈릴리 호수를 두루 다니니 중에 예수가 만난 많은 병자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나았다. 그의 제자와 고향사람들만 지금까지 예수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다른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셨다(6:6b).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열두 제자의 파송(7): 예수가 첫 번째 제자들을 불렀을 때 더러운 영을 추방하는 첫 번째 치유를 행하셨다(1:26). 이제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6:7). 또한 그의 사역초기에 안식일에 치유하는 일로 인해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3:1-6). 잠깐 뒤에 열두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예수의 권위를 가지게 하여 파송했다(3:14). 고향에서 반대에 직면한 뒤에는 열두 제자들을 따로 둘 씩 짝을 지어 파송하시면서 치유의 사명과 마귀로부터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파송한다. 마가와 마태(10:1)는 공히 치유와 축사를 명령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치유하는(9:2)“ 가르침을 선포한다. 나중에 마가는 ”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고 말한다(6:12).
▶선교여행의 지침(8-11): 공관복음서에는 세 복음서 공히 제자들이 무엇을 입고 먹으며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할지에 대한 지침이 나와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이를 최소화하여 야생동물을 쫒아내는 지팡이와 신발을 가지고 가며 옷을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운동을 위한 순회설교자들은 그들이 여행하는 여러 마을의 정착 신자들로부터의 환대에 전적으로 의존하라는 것이다. 더구나 어디서 어느 집에 가든지 첫 번째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10). 좋은 음식이나 잠자리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든 것처럼 보인다. 어느곳에서든지 한 집이나 마을에서 그들의 메시지가 거부당할 때는 “ 그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떠는” 행동을 해야만 했다. 나중 랍비 전통에서는 이 상징적 행위가 이방인의 땅에서 거룩한 장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마을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행위로 사용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먼지를 떠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마을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그들의 길을 교정하고자 하고자 하면 희망의 표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의 요약(12-13): 마가는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귀신을 쫒아내며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고 그들의 선교여행을 요약하고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세례요한(1:4)이나 예수가(1:15) 말했을 때 회개했다. 또한 전통적인 치유하는 기름을
발라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
목회적 관점
오늘 말씀은 선교와 거절 혹은 기독교 선교와 선교사에 대한 잠재적인 거부에 대한 병행구들을 망라한다. 앞의 여섯 절은 예수의 고향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치유 선교와 나사렛 백성들이 그를 달갑지 않게 여긴 일을 말해준다.
6b– 13에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는 열 두 제자들을 둘씩둘씩 여러 마을들로 보내시면서 치유하고 선포하는 사명을 맡기시고, 또 그들이 거절당할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관해 지시하시는 내용이다. 그들이 거절당한 곳을 떠날 때는 “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야 했다. 이것은 유대 전통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이 여행한 이방인 지역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이방인 땅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많은 기독교 교회들이 ‘ 선교’ 와 ‘ 전도’ 를 예리하게 구분해서, 선교는 행동으로 전하는 것이고, 전도는 말로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때로는 전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교 쪽으로 이끌려가기도 한다. 이렇듯 선교와 전도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이 있다. 나사렛에서 예수의 목회와 “ 마을들” 에서 제자들의 목회는 둘 다 같은 것으로, 치유하는 “ 선교” 와 선포하는 “ 전도” 를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말과 행함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여러 다른 단체들의 사이의 민감성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2004년 성탄절 다음 날 무시무시한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덮친 후, 미국의 기독교인들의 원조를 포함해서 여러 곳에서 많은 구호물자가 쏟아졌는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물자 원조를 제공하는 것(선교)을 지원을 받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전도) 기회로 사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지역의 무슬림과 불교도들은 그런 행동에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았는데, 인도와 스리랑카 지역교회의 지도자들은 종종 심하게 불편해 했다.
몇 년 전에 에모리대학 졸업식에서 Hugh Thompson은 “ 행함” 과 “ 말함” 사이의 통합과 균형에 대하여 강력한 실례를 알려주었다. Thompson이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연설을 했는데, 보통 그렇듯이, 학생들은 졸업식 내내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딱 한번, Hugh Thompson이 연설할 때 모두 말을 멈추고 귀담아 들였다. 그는 단 위에서 가장 교육을 적게 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군대에 지원해서 헬리콥터 조종사가 되었다.
1968년 3월 16일, 그는 베트남에서 정규 순찰 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마침 William Calley 중위가 지휘하는 미군 부대가 수십명의 비무장 주민들-노인, 여성, 아이들-을 학살하고 있는 Mai Lai 마을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Thompson은 헬리콥터를 부대와 주민들 사이에 착륙시켰다. 그는 뒤에 타고 있는 기관총사수에게 헬리콥터의 기관총을 미군에게 겨냥하라고 명령하고, 민간인에게 사격을 하는 군인들에게 민간인 학살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Hugh Thompson의 행동은 수십명의 주민들의 생명을 구했고,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 했다. 삼십년 후에 육군은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마이크 앞에 서자 소란스럽던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Thompson은 자기의 믿음에 대해 단순한 문장으로 이야기했다. Thompson이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Thompson에게, “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해주어라” 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말씀, 예배에서 들었던 말씀, 성경에서 보았던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들은 벌떡 일어나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Thompson이 그의 믿음에 관하여 한 말은 무게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말한 그 길을 확실하게 걸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 행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우리가 ‘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가 하는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거나 복음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기를 거절할 가능성을 염려한다. 이런 염려는 널리 퍼져 있는데, 특별히 ‘ 주류교단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렇다. 그들은 강제적이거나 정서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 당연히 불편해 한다. 나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어떤 주류교단 여성 기독교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녀가 일하러 왔는데, 하시딤 복장을 한 유대인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불을 켜고서 그녀는 “뭘 도와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그는 “ 예수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녀는 곧바로 그를 위층에 있는 예수 관련 도서 코너로 안내하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뒤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 책을 보여 달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믿는 것을 말해주세요.” 그러자 그녀가 “ 성공회 신자로서 나는 무엇을 믿어왔는지 혼란스러웠다” 고 말했다. 그녀는 서둘러서 그녀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교회 밖에서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한다. 우리는 뻔뻔스러워지거나 공격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 월급등 다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거절당할 가능성(혹은 적어도 두려움이나 당황)에도 불구하고,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맡긴 사명의 일부라고 강조한다. 목회자는 이런 두려움에 대해 잘 인식하고, 과묵한 사람들에게 교회 밖에서 그들의 신앙을 말하는 것에 대해 조언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Hugh Thompson의 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말과 행함 사이의 통합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회중이 깨닫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복음전도가 “그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획득하는 것” 이나 “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것” 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의미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이지, 경쟁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전도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두려움은 회중들이 광을 낸 말씀이나 복잡한 신학이나 혹은 잘 조율된 교리를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사랑으로 진리를, 그들의 진심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말로,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하도록 부름 받았을 뿐이다.
설교적 관점
-고향 나사렛에서 예수가 거절당한 일은 옛 속담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갈릴리 바다 양쪽 해변에서 그리고 그 중간에서 놀라운 기적을 행한 후에 예수는 자기가 자라났던 곳 그리고 보통의 어린시절을 살았던 마을로 돌아온다. 그는 여느 유대 교사들이 하듯이 회당으로 가서 고향 사람들을 가르친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예기치 못했던 일인데 그것은 마을사람들이 마을 모퉁이에서 자랐던 “ 어린 예수” (little Jesus) 혹은 그들의 탁자나 벤치를 만들었던 “ 목수 예수” (Jesus the carpenter)가 하나님의 지혜로운 예언자로
나타난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히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을 놀라게 하지만 또한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먼저 그들이 가르침에 놀랐을 때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라고 묻는다.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2절)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멸시(contempt)하는
태도로 바뀐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라고 묻고 “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3절)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는
자신들이 늘 알고 있었던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고 추론한다.
- 무엇이 나사렛 이웃들을 예수에 대해 그런 부정적이고 터무니없는 반응을 가지게 했을까? 본문에 드러난 인간의 감정 배후를 찾아보는 일은 왜 마가가 이 이야기를 마가복음에 포함시키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설교해야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준다. 분명히 이 본문은 나사렛 마을이나 예수 자신에 대해 좋게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사람들은 버릇없는 태도, 질투하고 또 심지어 조롱하며 다가오고 예수는 이들의 변덕스러움에 신랄하게 맞대응한다: “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4절) 예수와 마을사람들 간의 설전은 이웃들과 예수 자신 모두의 인간성에(humanity) 대해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본문처럼 이야기 본문을 설교할 때 제기할 수 있는 한 좋은 질문은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보통 어려운 일을 하던 우리 이웃이 기적을 일으키는 선생이 되어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 이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보길 기대하는 것을 보려하는 경향이 있고 우리 선입견에 도전을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느리다는 것이다. 나사렛 마을사람들은 예수를 자신들이 늘 알고 있었던 예수로, 그들의 기대와 다르지 않은 예수로 보기를 기대한다. 예수께서 지혜로 설교를 하고 능력을 행할 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제한된 관점을 넘어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누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Whom do we take for granted?)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면서 어떤 지혜와 능력을 기다리고 있는가[마을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이다.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마가는 예수께서 능력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5절).
이것은 문제가 되는 기록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인 예수에게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부여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예수의 인성의(humanity) 실체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께서 사역 초기 광야에서 유혹 앞에서 또 사역 말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운명을 두고 갈등했을 때처럼 여기서도 그는 인간의 한계를 두고 갈등한다: 자신의 소명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기력해지는 모습. 그러나 예수의 무력함은 일차적으로 예수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 대한 것 즉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설교자는 우리의 제한된 믿음으로 인해 잃어버린 기회와 상실된 축복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마가는 암시적으로 이 본문에서 마가복음이 계속해서 제기하는 문제를 또 제기한다: 이 예수는 누구인가?(who is this Jesus?) 예수가 갈릴리 바다 폭풍우를 잠잠케 할 때 그와 함께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막 4:41)라며 놀란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때 이것을 본 사람들은 “ 크게 놀랐다” .(막 5:42)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고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수의 정체성에 관해 같은 질문을 하고 그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다.
-나사렛에서 일어난 예수의 거절이야기는 12제자들의 선교를 준비한다. 마가가 이 특정한 시점에 나사렛에서 예수가 만난 당황스러운 사건을 복음서에 포함시킨 이유는 다양한 대접을 받게 될 12제자 선교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제자들이 주의를 받는다: “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을 고발할 증거물로 삼아라.” (11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사렛에서 예수의 경험을 떠 올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의 와중에서도
예수가 치유사역을 계속하고 “ 몇몇 병든 사람들” 을 고친 것처럼(5-6절) 제자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13절)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사역에 있어 우리는 그 반응에 책임이 없고 단지 우리자신의 충성에(faithfulness)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담대함과 믿음으로 증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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