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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4장 26 ~ 34 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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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복음서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그런 것처럼, 오늘 본문에는 평범하고 쉬운 이미지와 매우 난해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본문의 첫 번째 의미는 잘 알려진 대로 비유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로 해석함으로 드러난다. 첫 번째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농사짓는 일에 비유한다. 농부는 땅에 씨를 심지만 씨가 자라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특별히 없다. 오늘 비유에서는 농부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 동안 그는 밤낮 자고 일어나기만 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잠을 자는 농부와 같다. 혹은 하나님 나라는 씨가 자라는 동안에는 자다가 추수할 때가 되자 깨는 농부와 같다. 우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할 경우를 감안해 예수는 두 번째 비유를 제시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이 씨는 가장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만들어 새들이 그 그늘에 둥지를 틀 수 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비유의 수동성의 이미지와 기대를 넘어서는 경이로운 성장의 대조가 은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성서적, 기독교적, 개혁주의적으로 아주 핵심적인 것이지만 진정으로 받아들이거나 믿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와의 친밀성이 우리
안에서 씨가 자라듯이 자연스럽게 자란다. 어머니 품의 아기처럼 편안하게 자는 것이 도리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안심하며 잘 수 있게 하는 신뢰가 작은 씨를 갖고 (농약을 뿌리거나, 분갈이를 한다거나, 일조량을 계산하는 식으로) 온갖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잠과 쉼을 가능케 하는 신뢰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업적을 쌓기 위해 미친 듯이 바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도덕적 교리적 입장을 전력을 다해 고수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열심과 교조적 태도는 우리에게 중요해 보인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과 통하는 것 같다.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을 열심히 일하고 헌신함으로써 성취한다: 회사를 잘 운영하고,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후보자를 선출하고, 보기 좋은 몸매를 가꾸고, 마당의 잔디를
잘 관리하는 등. 이것들은 모두 바람직한 일들이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거나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수는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과의 친밀성은 씨가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을 대하는 아주 다른 방식을 소개하신다. 추수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올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성장의 원동력은 그런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아주 작고 무력해 보이는 씨를 노래하는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무성한 가지로 변화시킨다. 즉 이 사랑이 작고 불완전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우리와 모든 피조물들이 그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광휘로 변화시킨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이런 특별한 신학적 해석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가 이런 식으로 비유를 해석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저항을 한다. 익숙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단순하고 맘에 쏙 드는 메시지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비유는 잘 길들여진 이미지에서 이상하고 난해한 유비로 연결된다.
  오늘의 본문은 “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는 구절로 맺어진다. 이 구절은 비유보다도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이 구절을 갖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어려움과 혼동 없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비밀스런 요령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해라는 것을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따로 설명해주셨다는 구절 직후에 생기는 일들을 통해 그것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판단할 수 있다. 그들이 배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폭풍이 몰아쳤고, 그들은 모두 무서워했다. 거의 배가 침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를 깨웠다. (예수는 이런 소란 중에도 비유의 농부처럼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왜 제자들이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예수는 “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예수에게는 그들의 두려움이 이해가 안됐고,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침착함이 이해가 안됐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예수는 매우 실망하셨다. 예수는 치유와 비유와 비유에 대한 추가 설명 등을 통해 아주 기쁜 소식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을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 무리들, 2000년 기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그렇게 열심히 주려고 하는 것을 받는 것을 극단적으로 어려워한다. 이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는 설명을 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그 이상함이 진동하여서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와 정서가 느슨해져서 예수의 낯설고 경이로운 소식이 우리 속으로 쳐들어오도록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석적 관점 
 
▶비유; 감추임과 성장 
 4장에서 복음서 기자는 현재적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를 함께 지닌 하나님이 사랑하는 공동체의 성장에 관한 비유들을 보여주고 있다. 비유에는 행동의 격려, 인내에 대한 충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비유들은 감추임과 성장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kin-dom/친족공동체)에서 피난처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비전을 보여준다. He basileia tou theou는 마가복음에서 14번이나 나오는데 보통 ‘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통치’ 로 번역되는데, 오늘의 문화에서는 쉽게 번역될 수 없는 고대의 은유이다. 주후 1세기에 권력과 왕국들은 로마황제의 것이었다. 초대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시저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라고 설교했다. 이는 대담하고 급진적인 주장인 데 내부자들을 로마황제의 선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와의 관계에 의해(막3:31-35 참조) 정의하고 있다. 21세기의 다양한 문화에서는 급진적인 내포(inclusion)의 주장은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에서 평등한 관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basileia tou theou를 하나님의 친족 공동체(kin-dom of God)로 번역한다.  
▶ 4장의 구조: 4장에 나오는 여러 비유들은 서로 얽혀져 있고 교차 해석과 정보를 제공한다. 마가는 반복을 문학적 도구로 사용한다. 아래 4장 개요는 일종의 교차대구법적 방식으로 볼 수 있는데 전체 장을 보는 관계의 관점을 보여준다.  
  4:1-2 서론: 예수가 무리에게 가르치다
A 4:3-9 씨뿌리는 자의 비유
B 4:10-13 비유 입문
A’ 4:14-20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
B’ 4:21-25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비유
C 4:26-39 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
C’ 4:30-32 겨자씨 비유
B“ 4:33-34 들을 수 있는 비유들, 제자들에게 설명하다.
▶ 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26-29절): 마가복음에만 있는 비유이다.
26-27절 씨를 인간(어떤 사람)이 뿌린다. 씨는 14절에서 ‘ 말씀’ 을 말한다. “ 땅에” (epi tes ges/on the ground)라는 말은 두 비유에서 세 번 나오는데(26,31,31), NRSV에서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On the earth라는 구절이 on the soil이라는 뜻과 throughout the
world라는 두 가지 뜻을 전할 수 있다. “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시간을 재는 방식이다(창1:5b참조).
28절 “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구절은 구약이나 후기 유대문서에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홀로 하신 일을 말한다. 예수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유대교와 기독교신학자들에 간의 논쟁 즉 “ 인간의 최종적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인가, 인간의 노력이 영향을 미치는가?” 라는 것이다. 마가는 인간은 씨를 뿌리는 일에 사명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자라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성취는 한 단계 한 단계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 씨를 뿌린 사람은
알 수 없고 오직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밖에 없다. 
29절은 초대교회와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역의 행동을 의미하고 있다. 종말론적 긴급성을 “ 곧”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4장에 5번, 전체적으로 42번 마가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다.
“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댄다” 라는 구절은 요엘3:13의 묵시적 결론과 상통한다.    
▶ 겨자씨비유(30-32절) 눅13:18-19, 마13:31-32(Q자료) 도마복음20장에 병행구 30절 하나님의 친족공동체는 신비인데 마가는 그 딜레마를 두 번이나 지적하고 있다.
31-32절 겨자씨는 대단히 흔하고 크기가 작아 큰 식물과 비교하여 잘 자란다. 작은 시작이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겨자씨 비유는 역설적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겨자씨는 나무가 아니라 덤불(bush)이다. 향나무(cedar)와 같은 큰 나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는데 적합할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덤불 이미지가 신경이 쓰여 나무로 바꾸었다(마13:32;눅13:19). 그 변경을 겔17:23에 의거해 정당화 한다. 새들이 나무에 깃들이고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이방인들이 종말에 함께 모이는 것을 나타낸다. 
▶33-34절 누가 이런 것들을 이해할까? 비유는 수수께끼와 같다. 마가는 비유에서 듣는 사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반복해서 말하는 요점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구원의 사역에 대한 교회의 특별한 지식을
마가가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목회적 관점
 
“ 예수는 그와 하나가 된 수많은 비유를 말했다.” 이 문장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본문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잘 알려진 이 비유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이 어떻게 하나인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비유들은 여전히 그것 자체로 남아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깨뜨려 열고 있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가리키고, 간접적이지만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치 예수가 가져 온 왕국 그 자체처럼.

마태와 누가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에는 가르침에 대한 집중적인 본문은 없지만, 4장이 예수가 비유를 사용하는 방법와 이유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왕국의 비밀은 비유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물론 예수가 이 이야기를 열 두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 - 4:10 이하)에게 설명할 때에도 제자들 자신들이 이해한 것보다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가는 제자들이 오해하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예수의 전 생애와 죽음이 가장 심오한 비유일 수 있을까? 제자들은 이 가장 강력한 비유마저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가?
씨앗과 추수의 비유는 하나님의 왕국을 겨자씨에 비유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라는 초기의 비유를 기초로 한다. 마가복음은 우리의 믿음을 겨자씨 크기만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평범하고 단순하게, 우리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을 능가하는 왕국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다. 이 잘 짜여진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엿볼 수 있다. 아주 작은 씨가 아주 크게 자라는 식물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놀랍게도 새들이 이 널찍한 집의 그늘에 둥지를 짓는다. 하나님의 통치도 그렇다. 농부처럼 우리도 싹이 트고 자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추수가 되며, 씨앗에서 나온 나무는 가지를 뻗어 휴식과 노래와 풍요의 자리가 된다. 혹자는 우리들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도 왕국에 관한 비유적 설명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마가가 서로 묶어놓은 두 비유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많은 신학적 해석들을 낳았다.
왕국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오는 것인가? 추수를 종말론적 시간에 있을 미래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증명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장과 추수를 통제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종교를 믿는 사람과 특정한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우선적인 이유가 세계의 사악함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가의 작은 계시록이라고 하는 13장은 이런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묵시록적인 종말과 함께 온다는 어떤 시사도 없다. 오히려 왕국의 신비는 그것이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미 드러났지만 동시에 아직 감춰져 있다.
마가는 여기서 예수를 철저하게 목자로 설명한다. 이것들은 희망으로 가득찬 비유들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상에 씨를 뿌린 것처럼 이미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겨자씨에서 나무가 놀랍게 성장하는 것처럼,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다가오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이 왜 예수가 이 비유를 말했는지에 대한 또 다른 근거로 끝났지만, 여전히 긴장이 지속되는 채로 남겨져 있다. 한편으로는 예수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변변찮은 인간의 영상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이 이야기들을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 설명” 할 때,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고 한 칼빈의 지적은 옳다. 동시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의 신비와 현실이 여전히 우리가 아는 인간 현실 너머에 있다.
왕국의 생성에 관한 예수의 이야기들이 가진 의미의 무궁무진한 범위에 대해서는 계속 숙고하는 것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맨 처음 공동체에게 그러했듯이 우리에게도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한다. 제자들처럼, 또 초대교회처럼, 우리도 이해와 오해 사이에 매여 있다. 마가가 그린 예수의 초상은 우리가 제자도를 이해하고 제자로 살려고 하는 시도를 계속하게 하는 요소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비유를 말하는 사람을 따라가면 우리의 삶과 죽음의 역설과 긴장을 일깨우게 된다. 선함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인간의 권세는 위협받는다. 그러나 죽음이 생명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제안하시는 생명의 징조 아래에 서 있는 동안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예수는 그와 하나가 된 수많은 비유들을 말했다. 그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비유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징조들과 말들 아래 있는 비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 안에 소망이 있다. “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아무도 이 질문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 행동, 죽음 그리고 부활의 맥박은 이성을 잃고 소망이 없는 세상에게는 감춰진 비밀을 가리킨다. 이 맥박은 하나님의 심장박동이다. 그의 명령과 통치는 자비와 함께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설교적 관점
 
-우리가 1980년대 초 내쉬빌에 살고 있었을 때 뜰에 지저분한 잡초가 있었다. 나는 1월과 3월에 이것들을 잘라내어 바닥에 버렸고 그것이 끝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5월에 작은 갈색 그루터기에서 푸른 새싹이 돋아났고 한여름에는 다시 키가 크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땅바닥 그루터기로부터 시작하여 7월에 완전히 덤불로 자라난 이 과정을 놀라움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말하는 이 비유는 이런 류의 역동적인 힘과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는 종종
비유를 사용한다. 왜 일까? 비유란 헬라어 어원 파라발로( p a r a b a l l o ) 가 뜻하듯 우리들의 삶과 나란히 놓여진 이야기이다. 짧고도 관심을 끄는 이야기를 사용하여 예수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비유를 사용하여 예수는 상상함에 있어서 변화 즉 우리자신, 하나님, 그리고 이웃을 보는 법에 있어서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힘과 현존을 새롭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인식하도록 도전을 주려고 한다. 비유는 성서본문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 보는 창문을 열게 도와줄 수 있다. 비유를 사용하여 예수는 상상력을 강조하고 의지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2개의 비유도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첫 번째 비유 (26-29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천에[씨를 뿌리는 역할] 달려있음을 강조한다.
왜 예수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달려있다고 강조하려는 것일까? 예수는 우리들이 농부의 인내를 갖도록 촉구하는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비유인가 아니면 예수를 따랐던 첫 세대들의 점증하는 조급함에 관한
비유인가? 우리는 또 씨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또 하나님의 신비와 놀라움에 대한 강조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신비와 놀라움을 인식하면서 살고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역동성과 생명력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상상력을 너무 빨리 닫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밭이 심기우는 것을 준비해왔듯이 역사도 그렇게 준비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언자들의 삶을 통하여, 세례요한을 통하여 세상이
준비되어왔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reign of God) 예수의 삶을 통하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 나타났다면 왜 역사는 그것에 대해 무관심한가?
예수는 두 번째 비유를 통하여 이것을 설명한다. 겨자씨는 팔레스타인에서 “ 가장 작은 것” (the smallest thing)을 말할 때 흔히 사용하는 은유(metaphor)이다. 그 씨에서 나온 식물이 집처럼 크게 자라고 새들은 그 식물의 검은 씨앗을 좋아했던 것 같다. 겨자씨처럼
예수의 추종자들은 의심많고 두려움이 가득차고 또 예수가 말하거나 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합지졸같은 무리이다. 역사 속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무리들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는 강조한다. “ 그렇다.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씨이지만 그 씨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될 것이다.” 다시 그는 가장 작은 씨를 취하여 변화시켜 큰 나무로 만들어 모두를 생존 가능케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관해 말한다. 이 비유는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겸손한 비유면서 또 힘을주는 비유이다. 
-오늘 본문은 막 4:11-2에 처음 기술된 신비로 끝나고 있다: “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 준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이 말씀의[신비] 방점을 찍는다.  오늘 본문 비유의 마지막 언급에서 보면 예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한 많은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해석은 예수가 갈급한 심령을 지닌 자들 곧 생명의 떡을 기다리는 사람들, 세상의 답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모든 비유에서 씨는 중요한 이미지이고 나아가 성서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도 중요하다. 에스겔도 그것을 사용하고 (겔 17:22-4) 요한도 (요 12:24) 또 바울도 (고전 15:35-8)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작고 죽은 것 처럼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라나는 생명의 오래 참음을 상징한다. 태초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하나님은 온 세상을 돌아다닐 강한 바람을 창조하신다. 이 비유들에서 예수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있는 구도자들을(seekers in every age and every place) WCC, New Delhi 총회]이런 여행에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우리 설교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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