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21-35절 용서해야 할 이유
(2016.07 17 메디윌병원)
당시는 율법으로 모든 행위가 판단되던 시대로, 율법은 두 가지 “하라”와 “하지 말라”는 계명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챤들은 성경에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려고 애쓰면서 스스로 잘 한 것과 못한 것을 비교해 보고 우리의 선행이 악행보다 많을 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아무도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이미 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고 명령을 우리는 행함으로 율법을 파괴한 범법자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이행한 사람들이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용서와 은혜의 중요한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 율법주의라는 행태 속에서 군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이 강조되다보니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들 간에 정죄와 고발과 비판이 조성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비판과 고발의 살벌한 사회 풍토를 지켜보시면서 주님은 마 7장 1절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너희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당시의 사회는 사랑과 용서를 망각한 사회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주님은 천국에 놀라운 교훈을 가르쳐 주십니다.
천국은 정죄하고 고발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나라요,
이 천국에 속한 백성들의 삶은 용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런 표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두 번까지는 용서하라, 그러나 그 이상은 용서한다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또한 랍비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까지는 용서하라, 네 번째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예수님께 사랑을 배웠던 베드로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21절“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려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바리새인들은 두 번을 강조하고 랍비들은 세 번을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우리 제자들은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여유를 갖고 선심을 써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일곱 번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있다는 용기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우쭐대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몇 번까지 하실 수 있나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용서의 횟수를 말합니다.
우리 생각으론 당연히 칭찬받을 수 있는 그런 제안입니다.
베드로의 용서는 인간적으로 보면 엄청난 관용 같지만 그것은 인간의 한계, 도덕의 한계, 양심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였습니다.
그는 이 말하면서 아직까지도 용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22절을 보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아마, 굉장히 놀랬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이 세 번까지는 봐주잖아요.
그래서 삼세번까지는 용서해 주는 게 대세인데, 자신은 일곱 번까지도 용서 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주님은 일곱 번을 칠십 번까지라도 용서해줘라십니다.
이 말씀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니까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일까요?
그리고 491번째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이야기 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은 우리들은 미워할 수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 말은 곧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주님 말씀처럼 우리가 계속해서 용서해 주는 게 쉬운 일인가요?
만약에 누가 내 발을 일부러 밟는다고 상상해 봅시다.
한번은 뭐 어쩌다 그랬겠지 하는데, 두 번째 밟으니까 조금 기분이 상합니다.
그런데 막 세 번째 내 발을 밟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인상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깔아서 그 사람한테 말을 하겠죠?
“왜 이래요? 하지마요”
그렇게 일곱 번까지 참았다고 합시다.
하지 말라고 경고도 하고, 이리 저리 피했지만 기어이 여덟 번째 내 발을 밟았다면, 결국 분노가 폭발하여 주먹이 올라가겠죠?
조금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계속해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용서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네요.
우리가 신뢰하는 주님은 무한히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율법과 도덕과 양심의 세계를 초월한 영원하고 무안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이런 용서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은 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주님의 삶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시라면 그 주님을 통해서 참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용서의 동기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가정이 잘되기 위해서, 혹은 민족이 잘되기 위해서, 혹은 교회가 잘되기 위해서, 혹은 내 출세를 위해서, 내 직장이 잘되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이런 동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동기도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향한 용서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이어야만 합니까?
주님은 본문에서 그 이야기를 하시고자 탕감 받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는 신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달란트는 그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장 큰 단위로,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일당의 6천배 해당하는 돈으로 1만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약 6조원 정도입니다.
일당 10만원씩 6천만명 즉 남북한 인구 전체 중 경제인구 모두 일을 해야 다 갚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화가 나 그 신하를 불러 돈을 갚으라고 말했지만 신하는 갚을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어 괴로워하는 신하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25절~26절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의 명령에 그 신하는 갚을 수 없으면서 "제발 참아주세요. 꼭 다 갚을테니" 기한만 연장해 달라 애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절망과 낙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 임금이 종에게 파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집을 탕감하여 주었다”
6조나 되는 빚이 이젠 없다고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동기는 한 가지 오직 불쌍히 여김 때문입니다,
불쌍함을 느낀 임금의 사랑이 신하가 진 6조의 빚이 없다고 탕감의 선언을 합니다.
웬 은혜입니까?
웬 파격적인 사랑과 은총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금이 이젠 빚이 없다고 선언 할 때 신하의 기분 어떠했을까요?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겁니다.
늘 마음 한구석이 짓눌러 아팠는데 임금의 약속 한 마디에 그 모든 아픔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이 빚을 다 면제받은 신하가 날아가는 심정으로 나오는데 마침 백 데나리온을 빌려간 친구가 보입니다.
자기가 졌던 빚의 60만분의 1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입니다.
그 신하는 얼른 그 친구에게로 달려가 어떻게 합니까?
28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적은 빚을 진 사람의 목을 잡고 “왜 빌려간 내 돈 안 갚는거야!” 소리치며 몰아붙입니다.
본문에서 “목을 잡고”의 표현은 아주 양호한 표현입니다.
원문 그대로 실감 있게 표현하면 “모가지를 비틀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 민망하고 미안하고 당황해서 신하에게 애원합니다.
29절~30절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이 광경을 보던 동료들이 옥에 갇힌 친구가 너무도 불쌍해서 곧장 임금께 달려가 보고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흥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임금은 격분하여 당장에 그 못된 신하를 궁전으로 불러들입니다.
32절~33절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고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않느냐?”
화가 난 임금은 신하를 감옥에 가두고 그 빚을 전부 갚도록 명령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리는 똑같이 격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 이야기 속의 임금이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지적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임금이 저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는 안 그렇냐?”
당신과 저는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그 부채는 우리의 방법이나 우리의 노력으로 상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결단과 의지를 통해서 이 빚을 갚을 수 없고, 내 평생을 살아도 우리의 죄의 빚은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과 저의 모든 죄의 빚을 갚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 우리의 살인, 우리의 간음, 우리의 도적질, 우리의 거짓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신음하고 고통하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보배로운 마지막 핏방울을 떨구시며 암흑으로 변한 하늘을 향해 요한 19장 30절에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요?
이 말의 본래 뜻은 “빚은 다 갚았다”입니다
“네 빚을 내가 다 탕감했다” 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우린 값없이 은혜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른 방법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씻음 받은 우리가 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그렇습니까?
저와 당신의 죄가 별로 심각하지 않은 죄라 생각하나요?
왜 내 곁에 있는 이웃과 형제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 것일까요?
지금도 주님은 계속적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속적인 사랑과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우리들 아닌가요?
주님은 우리들에게 덧붙여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은 형제만을 범위로 국한 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남편을 용서하십니까?
당신의 아내를 용서하시나요?
당신의 가슴에 칼을 꽂고 있는 자녀를 용서하십니까?
아니 당신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가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웃을 용서하시나요?
아니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용서하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우리는 교만과 자기 영광과 정욕의 죄악으로 가득찬 자들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도 빨리 은혜를 떠나서 죄를 짓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를 아무런 댓가 없이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중심으로 용서할 수 없다면 먼저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는지 그 놀라운 사랑을 다시 한 번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이웃에게 당한 상처를 생각하기보다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될 축복을 묵상해 봅시다.
엡4장 32절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너희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그 용서를 생각하면 얼마나 충격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감각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했음 고백합니다.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이 귀한 줄을 모르고 얼마나 엄청난 대가인지를 모른채 무감각하게 살아온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 한번 주의 은혜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하시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에 두 손 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드로전서 1장 15~16절 "거룩한 삶" (1) | 2025.03.23 |
---|---|
마태복음 28:1 –10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아 (0) | 2025.03.23 |
마가복음 12장 41~44절(38절-13장 2절)“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외식의 결과” (0) | 2025.03.23 |
요한복음 5장 1~9上절 “당신의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0) | 2025.03.01 |
요나서 1장 1~3절 아직 남겨 놓으신 기회 (1) | 2025.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