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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한복음 5장 1~9上절 “당신의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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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9당신의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2016. 06.12. 메디윌병원

화창한 오후 오늘도 저를 거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해가 뜰 무렵 양떼와 목동들이 지나갔고 곧 해가 질 무렵이면 다시 나갔던 양 떼와 목동들이 돌아옵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 하고 바라보는 것은 그저 곤궁에 빠져있는 환자들과 양들뿐입니다.

삶의 의욕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양과 병자를 보노라면, 살아있다는 의미와 희망도 없이 목숨만이 붙어 있는 실정입니다

 

아무런 희망 없이 나는 이런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본문을 1절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한 유대인의 명절에 참석하셨습니다.

어떤 명절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명절(유월절, 초막절, 칠칠절(오순절)), 예루살렘 부근 20마일(32킬로미터) 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 남자들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키도록 규정된 절기입니다,

그 곳에는 양문이 있었고,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고 다섯 개의 행각이 있는데 곤궁한 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양문(羊門)양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위해 사용되는 양을 사고파는 장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할 양들이 죽어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옆에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베데스다에는 절실한 필요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볼 수 없는 맹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신체가 뒤틀리거나 마비되어 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가난한 자와 구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움직여 그 중 가장 먼저 들어가는 단 한 사람에게는 어떤 질병이든지 나음을 얻는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천사를 본 사람도, 그리고 병을 나은 사람 또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에 의해 사람들은 자꾸 몰려듭니다.

 

많은 병자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 질병이 얼마나 귀찮고 괴로운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막연한 기대에 베데스다에 자신의 몸을 맡긴 그들이 측은하고 불쌍합니다.

그런데 정상인들은 그들을 향해 죄의 결과로 병이 생겼다고 조롱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들의 눈총 때문에 병자들이 베데스다에 모였나 봅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는 베데스다 연못,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일까요?

소경은 눈이 보이지 않기에 언제 물이 동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절뚝발이는 물이 동함을 봤다해도 먼저 달려가서 1등을 할 수 없는 몸입니다.

혈기마른 사람은 마른 멸치와 같이 패기가 없어 1등을 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병을 낫고자 소원하지만 연못물이 동 할 때만 가능했고 그것도 제일 먼저 들어가야 고침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항상 분주하게 찾습니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거나, 점쟁이나 어떤 신통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운명에 맡깁니다.

심지어 교회다닌다고 하는 사람들도 치료의 대상, 안위의 대상, 물질을 채워주시는 대상으로 주님을 믿는 종교인들이 많은 현실입니다.

이런 모습은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삶의 도움을 하나님 아닌 세상 온갖 것에서 방법을 찾습니다.

주님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그들의 믿음과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 14: 25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그들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베데스다에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 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가족들과 함께 살던 그에게 치명적인 질병이 생기면서 모든 것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어떤 질병인지 이름도, 원인도, 치료방법도 알지 못해 서서히 마비되어 갑니다.

정말이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좋다는 약을 다 써 봤고, 용하다는 의사도 찾아갔고, 도움이 된 다는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니 안 해 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모든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병은 떠나지 않았고 더욱 중해져 갑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베데스다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주님은 베데스다에 셀 수 없이 많은 병자들 중 38년 동안 누워 있던 절박한 자를 보셨습니다.

병 고침 받기 위한 그는 그 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연못의 물을 휘젓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기만을 고대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38년 동안이나 다리가 마비되어 걸어보지 못한 불구자입니다.

혹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를 먼저 보았다고 해도 신비로운 치료의 능력을 멀찌감치 바라보는 동안,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이 쏜살 같이 물속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꼼짝달싹 할 수도 없고, 그의 곁에 있다가 물이 동할 때 번쩍 들어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는 치료받기 위해 동참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거리가 먼 구경꾼입니다.

그에게는 병을 낫고자 하는 희망은 있지만 손에 잡을 수 있는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냥 불편하지만 지금의 환경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누워 지내야만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십니까?

살아 있지만 그는 38년 동안 누워있기에 산송장이라는 말의 표현이 정확합니다.

 

저는 그런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정말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소변을 해결해야 한다는 자체가 가족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고, 식사와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의 시간였습니다.

 

38년 병자는 그런 도움조차 받을 수 없던 사람입니다.

이곳의 환경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최악의 상황이며, 냄새와 위생의 개념은 형편없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현장입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모두가 그런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 곳은 각종 곤궁에 빠진 사람들로 넘쳐나 누구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처지이다 보니 남들을 돌볼 정신이 없습니다.

베데스다는 자기의 희생과 남을 위한 사랑이 없는 암흑의 장소입니다.

 

오늘날은 병원에 입원하면 편하게 누워 TV도 볼 수 있고, 요양을 통해 치료할 수 있지만, 베데스다는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와서 말이라도 붙여줄 때면 그 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요?

다들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이제나 저제나 물이 동할까 집중해야는데요.

 

오늘 절망과 죽음이 가득하고 희망이 없는 그 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 그곳에 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치료를 위해 누구도 찾지 않는 베데스다에 찾아오셨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희망이 없는 곳, 공동묘지와 같이 썩어 냄새 나는 곳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못 주변에 가득한 병자들 가운데서 바로 그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가족도, 친구도 없는 세상에서 완전히 홀로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외면하는 그 사람을 찾아가 먼저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부패하여 영원히 죽었던 영혼입니다.

아무런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소망 없는 우리에게 찾아와 소망의 말씀, 복음을 주셨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힘들지?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싶으니?” “너의 눈물을 내가 닦아 주마...” 라고 따뜻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뭐라 대답하나요?

나를 물이 동할 때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제까지 물이 동함을 보지도 못했고 고침 받은 사람도 못 봤어요. 그러나 막연한 기대감으로 여기서 자기와 함께 있다가 물이 동하면 물속에 넣어 달라는) 무언의 요청입니다

 

그의 대답은 한탄과 절망이 섞인 불평입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볼 때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든지 이 병에서 고침을 받아야겠습니다.” 라는 절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라!”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이제 일어나라!”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행위 입니다.

 

왜냐하면 38년 동안 누워 있던 사람에게 일어나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가능합니다.

난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환경을 원망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께서 질문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삶의 짐을 벗어버리길 원하니?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소연하고 불평하기에 급급합니다.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요.”

이 말은 불평이요,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 나오는 한탄이고, 회의적인 모습에서 하는 탄식입니다.

 

저는 오늘 이 곳에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창조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그를 찾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긍휼한 자비의 심정으로 먼저 찾아오시고 우리를 품에 안아주십니다.

우린 단지 그 분을 내 주님으로 모실 때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벧전 5:7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저가 권고(관심을 가지신다)하심이니라

 

물론 인생은 너무도 복잡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고 많은 병자들 중, 유독 그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을까요?

애통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는 당신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 계신 그 분이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치료하시고 형통케 하시는 것은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3 “누구든지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문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주님은 "치유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고, 다만 그 사람에게 행동을 명령하셨을 뿐입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실천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의심하지도 망설이며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도 유대인이기에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되는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일어나 걷는 것이 율법에 심판대상이 되는 것을 알았지만 율법보다 예수님의 명령이 먼저임을 알았기에 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치유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연못에서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니 이전보다 질병이 중해져 죽어갔을 것입니다.

 

38년 동안 마른 장작더미처럼 누워 있다 보면,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장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깊은 터널 속에 있었지만 병들어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운명으로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나는 병들었을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라는 부정적인 믿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리들 중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고침을 받는다면, 바로 그 은혜를 자기가 받아야겠다.”는 집념으로 그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를 물속에 넣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나는 연못가에 누워 있어봐야 소용없어. 혹 만에 하나 물이 동하는 순간에 누군가 나를 넣어준다고 한들, 혼자 몸으로 재빨리 뛰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당할까?” 라고 실패를 확신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언젠가는 병 고침 받을 것으로 믿었기에 연못에 넣어줄 천사를 꿈꾸며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베데스다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죄와 세상 삶에 찌든 모습으로 희망을 등지고 속절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으로 삶의 변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신에 희망은 어디 있습니까?

나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틀림없이 가난하게 살 거라 믿나요?

공부도 못하고 돈도 없고 배경도 없으니 성공하기는 틀렸다고 합니까?

연령제한에 걸려서 이력서도 못 내보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고, 구조조정으로 제일 먼저 해고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부모님이 고혈압으로 돌아가셨으니, 당신도 혈압이 올라갈 거라고 믿고 있습니까?

우리 집엔 고질적인 가족력의 질병이 있기에 나도 그렇게 생을 마감할 것이라 생각하나요?

의사가 내 병은 못 고친다고 했으니, 유언장을 쓰고 주변을 정리해야 합니까?

당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는 방법을 다 동원해도 안 되니,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포기 합니까?

 

만일 당신이 이런 것을 믿어왔다면, 이제 당신이 믿는 모든 것을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처한 이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지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성공의 비결을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안 될 거라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나에게 그 지혜와 비결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반드시 나를 구원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판단과 지혜에 의존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를 찾아오십니다.

언제 누구를 구원할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분이 아니라, 그를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이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은혜로 고난에서 구원해주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마무리 기도

우리를 인생의 풍파속에서 보호하시고 건지시는 하나님.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주를 바라보고 우리의 소망이 되신 주님으로 힘을 얻게 하옵소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능력이 우리를 감싸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축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혜가 오늘 말씀 앞에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맡기고 새롭게 영원한 희망이 되신 주님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머리 숙인 모든 심령들 위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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