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장막절 마지막 날 예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heart)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복음서 기자는 이 생수가 성령이라고 선언한다. 요한에 따르면 성령은 예수가 올림을 받은 후에야, 즉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야 주어진다(12:23, 32). 성령은 예수가 떠난 후에야 내려온다(7:33). 예수가 가장 약한 순간에, 즉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열어 놓을 때 생수가 흘러나온다(21:18). 이것이 요한이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통 주제이다: 부재를 통한 임재, 죽음을 통한 생명, 연약함을 통한 능력. (presence through absence, life th. death, power th. vulnerability)
대부분 사람에게 이것은 모순이다. 어떻게 어떤 사람이 우리를 떠난 후에야 더 우리 가운데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이 끊어져 가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생명의 물이 넘칠 수 있나? 어떻게 연약함을 통해- 우리를 해치려는 세력(죽음을 포함)에게 우리의 약함을 노출하고도- 능력을(영생의 능력을 포함하여)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수 세기 동안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이 사복음서 중 가장 신비적이라고 평가해왔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자들 중 일부는 서로 대립하는 특성들을 강조함으로 -영과 물질, 혼과 육, 빛과 어둠, 개인과 집단 등- 이원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성서적 사고유형과 히브리적 인식 방식에 충실한 신비주의자들은 이원론이 아니고 변증법(dialectics)적으로 접근했다. 즉, 그들은 이 실체 간의 역동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에 주목했다.
14세기 도미니칸 수도사 Meister Eckhart는 요한의 영적 사촌이라 할 정도인데, 그는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사람의 부재를 통해 더 충실하게 체험된다는 것을 인간의 언어를 통해 설명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우리 속에서 말이 나오지만, 여전히 그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말은 밖으로 나오지만, 여전히 안에 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말은 밖으로 나오지만, 그 말을 형성하는 생각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더 엄격하고 효과적으로 사고한다면, 그 사고에서 나온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유익을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의 부재 상태에서 얼마나 깊은 지적, 영적 내용을 내적으로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우리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얼마나 효과적인가가 결정된다.
Eckhart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와 같은 인간의 표현력을 예로 든다:
모든 피조물은 안으로부터 흘러나오지만, 여전히 안에 머문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신다. 더 많은 것이 안에 있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밖에 있다. (The More [God] is within, all the more [God] is without.)
창조와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지만, 하나님 안에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구별(distinct)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separate)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 안에 더 깊이 거할수록, 하나님은 피조물 속에, 피조물을 통해 더 많이 흘러나온다. 초월과 내재는 하나님과 창조와 마찬가지로 반대되는 대립항이 아니다. 그들은 동시에 구별되면서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다.
더 나가, Eckhart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역동성을 삼위일체적 용어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존재 안에 머물면서 독생자를 낳고, 또 그런 존재 안에서 성령이 흘러나온다. 이와 같은 “안에 머뭄(remain within)”과 “밖으로 흘러 나옴(flow out)”의 이중적 특질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에 속한다. 이 두 특질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서로를 지지하고, 강화하고, 향상시킨다.
이와 같은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은 품는 것이다. 성령이 인간의 주체성이나 능력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인간을 격려하고, 북돋우며, 활력을 준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15:1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신뢰하고 예수의 방식을 믿는 것, 즉 예수가 한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나누었고(15:15),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고, 스스로를 그들과 세상으로부터 쉽게 상처받을 처지로 몰아넣었다. 예수를 신뢰하는 사람도 같은 일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5:12). 예수는 친구들을 세상으로 보내셔서(17:18) 그들이 받은 것을 나누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15:16).
이런 사랑은 -이와 같이 주고 받는 사랑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15:20)
생명을 주는 상호작용에 참여함으로 그들은 매우 상처받기 쉬운 처지에 빠진다. 살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셔서 세상이 죄(불신)와 불의(예수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주장)와 심판(이 세상 지배자의 방식이 참된 방식이 아님)에 대해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16:8-11). 이런 생명의 방식은 기쁨으로 인도할 것이고, 이 기쁨을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16:22).
주석적 관점
요7-8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모이는 유대인의 축제인 초막절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을 보도한다. 1세기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이 축제가 유대인이 가장 중요한 축제라고 했다. 왕상 8:2에 따르면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기간 동안 벌어진 축제이다. 본래는 추수축제였는데, 광야에서 바위로부터 흘러나온 생수과 같이 성전에서 흘러나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함께 하신다는 종말론적 희망과 결합하여 생긴 것이다. 축제의 기념행사들은 물과 빛을 포함하는 예식이 드려지는데, 이 둘은 요 8:12에서 예수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성인 예수가 단 한번 축제 때 여행을 갔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2:13-22에 성전을 정화하면서 계시와 갈등이 시작되었고, 복음서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유월절에 예수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6:4에서의 다가올 유월절의 간략한 언급도 생명의 빵 담화와 관련된 갈등과 밀접하게 일어나는데, 그것은 7:1의 선언으로 이어져 예수가 갈릴리에 유하는데 왜냐하면 유다에서는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예루살렘 방문에서 당국과의 갈등이 첨예화되는데, 7장에서 한 번은 죽음의 위협이고, 세 번은 체포에 대한 언급으로 네 번 언급한다. 예수의 체포와 죽임에 대한 언급은 다른 어느 장보다 여기에 자주 나온다. 7:39에서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영광을 처음 언급하는데, 이 축제의 만남은 첫 번째로 그를 돌로 죽이려는 8:59에서의 시도와 함께 끝난다.
요한복음에는 생수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의 첫 번째 이적에서 예수는 물을 풍성한 결혼식 포도주로 변화시켰다(2:1-11). 세례요한의 증언과(1:32-34)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3:5)도 물과 성령의 짝을 볼 수 있다. 3:4에서 ‘자궁’(kolia)이라는 단어가 7:38에서는 감정의 자리인 마음(새번역에선 ‘배’로)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 세 가지 용어(생수, 영, 자궁)가 두 군데 모두 나오는 것은 시사적이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위에서 다시 태어나려면 반드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예수는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7:38에서는 예수가 갈증의 자리를 풍성한 생수의 자리로 바꾸는 것이 바로 믿는 자의 kolia라고 말한다. 4:7-26에는 생수와 영에 관한 또 다른 대화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4:14)라고 했다. 마침내 7:39에서 영광의 순간의 다가왔을 때, 예수가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시면서(19:30), 피와 물이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다(19:34).
7:38의 성경의 인용은 해석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하나는 인용구의 원자료가 무엇인냐는 것이고, 누구의 마음인지에 관한 것 즉 예수의 마음인지 믿는 사람들의 마음인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는 인용구를 두고, 2세기부터 해석자들이 논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NRSV는 달리 주장 했는데, 이는 중요한 초기 사본의 문맥에 의해 지지되었다. 이러한 읽기에서는 부활절 이후의 신자들이 4:14에 나오는 샘물과 이미지가 비슷한 예수가 제공한 생수의 전달자가 되는데, 두 가지 해석 모두 성령의 살아있음과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이 예수에게서만 아니라 믿는 자에서도 나온다는 생각은 아버지와 아들이 믿는 자들과 하나가 된다는(14:20;17:20-23) 언급과도 일관성을 가진다. 예수와 그의 아버지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14:23)에게 집을 만들어주고자 했다. 성령은 예수 이후에 또 다른 보혜사로서 예수와 아버지가 그들과 현존하도록 했다(14:16-17,26;16:7). 이러한 구절들은 7:39에서 성령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을 해명해 준다. 설명에 따르면 복음서는 이 지점까지는 아직 성령이 오지 않았다고 제시하는데, 하지만 예수는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성령을 그의 떠남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보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의 두 번째 모호한 점은 예수가 인용한 구절이 어디에 위치하느냐는 것이다. 완벽히 꼭 맞는 것은 없고,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는 광야에서 바위로부터 나온 물(시78:15-16);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의 종말론적 약속(겔47:1-12;욜3:18);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것(슥14:8); 사막에서 물이 흐르는 약속(사43:9;44:3;58:11); 지혜, 그의 자녀들을 불러 와서 마시게 하는 것(잠18:4; 시락서24:30-33); 그리고 사랑하는 자를 동산에 있는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논에 흐르는 눈물로 비교하는 것(아4:15)등이 포함된다.
목회적 관점
예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시게 하라”(37b)라고 외쳤을 때, 육체적인 갈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정신 내에서 어떤 메마른 상태, 건조함, 삶의 유연성이 결핍된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나라를 볼 때 우리는 갈증이 전염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나라가 메말랐다. 관계가 건조하고, 리더십이 건조하며, 미래에 대한 꿈이 건조하다. 우리 교회에는 꿈이 말라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목이 말라서 성령을 필요로 한다. 예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시게 하라”고 외쳤다.
교인들 중에는 어디서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관계는 건조하고, 부서지기 쉽고, 고통스럽다. 관계에 금이 갔고 습기라고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목이 말라서 성령을 필요로 한다. 예수는 “목마른 사람은 내게 오게 하고 나를 믿는 사람은 마시게 하라”(37b~38a)고 외쳤다.
교인들은 그 물을 얻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더 경건해져야 할까? 교회에 더 자주 와야 할까? 서약을 강화해야 할까? 담배와 춤과 술과 저주하는 일을 멈춰야 하나? 기도만 해야 할까?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미국의 주류 개신교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성령강림절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느꼈던 적이 있는가? 그들은 크리스마스 전야에 갑자기 등장하고, 여전히 부활절에 나타나지만, 성령강림절에는 설교자가 회중에게 맹렬히 설교한다. 그들은 정말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교인들 모두에게 성령강림절 날에 빨간 색 옷을 입으라고 요청했다. 12명이 그렇게 했고, 다른 사람들은 잊었거나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령강림절에 예배 무용단을 두려고 애썼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절 본문을 6명이 6개의 각기 다른 언어로 동시에 읽어보려고 했다. 즉 장로교식의 방언으로. 우리는 트럼펫, 현수막, 그리고 우리가 치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치우려고 했지만, 전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교인들은 성령강림절에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성령강림절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 성령강림절 만찬이나 파티를 따로 하지 않는다. 성령강림절 퍼레이드도 없다. 성령강림절 카드를 주고받지 않는다. 심지어 상점들은 성령강림절이라고 써 붙여 놓지도 않는다.
왜 그런지 궁금해 한 적이 있는가? 왜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잃어버린 잔치일까? 어쩌면 사람들이 성령과 너무 가까워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성령강림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을 경축할 수는 있지만, 성령께서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육체에 오시는 것을 축하하는 일은 너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없애자. 누군가 말했다. “말이 죽었으면 내려와야지!” 성령강림절이 “죽은 말”이라면, 내려와야지. 그러나 인간의 육신에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
둘째로, 나는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까? 성령의 역할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들을 가르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성령강림절에서 내려온다면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에 관해 가르치려고 할 때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의 목록을 만들었다(갈 5:22-23a). 우리는 그것들을 축하하기 원한다. 우리는 확실히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그런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때때로 우리는 잃어버려도 될 만큼 여유가 없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없애버리곤 한다. 우리가 성령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성령 없는 기독교 신앙은 물이 없는 수영장과 같다. 많은 수영자세와 수영방법을 알고 있지만 수영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수영장에 있는 것이다.
성령강림절은 “죽은 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 말고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축하하는 일을 포기할 여유가 없다. 성령이 없는 세상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설명할 수 없어도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세계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불어 넣지 않는 세상은 있을 수 없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가 없는 세계는 있을 수 없다. 존재할 수가 없다.
어쩌면 당신은 이 설교를 “아마도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없애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몇 사람이 아멘을 하거나 혹은 박수갈채를 받을 지도 모른다! 충격 요법은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식을 들을 귀를 일깨울 수 있다. 우리에게 성령강림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성령이 없는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세상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설교적 관점
-이 짤막한 본문에는 두 가지 주제가 있는데 둘 다 설교하기에 좋은 자료가 된다. 첫 번째는 인간의 필요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37절)고 하여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말한다. 이 언급은 언뜻 보기에는 온 세상 모든 곳에 살고있는 인류 전체를 향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중에 목마르지(thirsty) 않은 자가 누가 있으며 무언가를 열망하지(thirsty) 않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 열망은 돈, 지식, 친근한 관계, 소유, 명성, 권력등이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무언가를 열망하고 현재의 지위보다 더 큰 무언가를 바란다.
-광고제작자들은 우리가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있어서 그들은 예수처럼 말하는 법을 배웠다. 오늘날 소비지향적인 사회에서 모든 광고는 본질적으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에 두고 있다. 다이어트?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원하는 만큼 체중을 줄여라” 자동차? “당신을 추월하지 못하게 하라” 노화방지 화장품? “너무 늦기 전에 주름살을 펴서 몸매를 아름답게” 오토바이? “이것들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당신을 첫 번째로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 향수? “섹시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놀라운 여성으로 피어납니다” 등등. 날씬해지기를, 젊어지기를, 섹시해지기를, 힘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모든 목마른 사람은 우리에게로 오라[라고 광고는 말한다].
-언젠가 연합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1960년대에 4개교단이 연합하여 창설한 미국의 진보적 교단-역자 주] 소속 릴리언 다니엘 (Lillian Daniel)목사는 한 정부청사 내에서 불공정 노동행위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그녀와 다른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을 때 한 젊은 경찰관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체포되기 직전 함께 찬송을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다니엘 목사만 따로 한 작은 경찰차에 갇혔다. 그녀를 호송할 책임을 맡은 그 경찰관은 작은 창문을 통해 자신의 무례한 대우에 사과하고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아픔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다니엘 목사는 “왜 당신은 자신이 하는 일을 미워하면서 여기서 계속 일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후에. 어쩌다 보니 이러게 되었어요. 나는 2년 후에 그만두렵니다. 그리고 난 아직 젊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 경찰관은 자신의 인생에서 보다 갈급한 것이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내가 당신께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어요”라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께 말하고 싶었던 때는 좀 전에,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나도 좋아하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찬송을 정부청사에서 부르고 있을 때였어요. 나는 당신들이 찬송을 부르는 그 소리가 좋았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이 사실을 알기를 원했어요.” 다니엘 목사는 “고마워요”라고 말했고 그 경찰관은 “당신은 곧 여기에서 나가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다니엘 목사]는 “당신도 그렇게 될겁니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이 젊은 경찰관같이 스스로 자기가 있는 자리가 본질적으로 맞지않다고 여기는 사람들, 삶의 심원한 의미를 찾는데 여전히 목말라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불협화음의 세상 한 가운데서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찬송처럼 예수의 부름은 그렇게 들려온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이 본문의 첫 번째 주제가 인간의 필요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 주제는 예수의 정체성 (identity of Jesus)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께 응답할 때 그리고 우리가 갈급한 것을 세상의 마른 우물에서 찾지않고 예수께 가져갈 때 일어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생명의 강이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생수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하는 것은 보다 급진적(radical)이다. 예수께서는 만일 우리가 목마름으로 그에게 오면, 우리 자신이 (we ourselves) 생명의 강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의[예수를 믿는 자]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목마른 사람들이 예수께로 올 때, 그는 단지 목마름을 잠시 면할 영적인 음료를 건네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들에게 성령의 내주(the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를 줄 것이다 (왜 이 본문이 성령강림절 성서정과에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유이다).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풍성한 생명의 물은 그들을 통하여 흐르고 또 흐르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언제나 우리의 마음 속에 두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 (Jesus in our hearts)를 무언가 행복한 어떤 것이나 높은 수준의 영적인 것으로 상상한다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은 그 안에서 철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영원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가 되었고 그 결과는 하나님을 천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을 신성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은 영광을 받으신 예수께서 다시 (once again)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육체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예수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이라는 작은 공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삶이 그의 것처럼 크고 생명을 주는 “생수의 강”(rivers of living waters)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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