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의 기독교인에게 누가복음의 이 구절은 기껏해야 이상하며 부적절하게, 심지어는 혼란스럽고 위험해 보인다. 예수께 제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간청할 때 예수는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난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도록 견책한다.
개신교 전통에서 기적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나무를 옮겨 심어지게 하는 능력을 요구하거나 어떤 다른 방식에서의 초자연적인 힘을 구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구절에서 예수의 두 번째 말씀은 우리를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 지난 십 수년간 교회와 사회는 여성과 남성이 자기 가치에 관해 건강한 의식을 갖도록 돕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스스로를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라는 예수의 권면은 (자기 가치를 끌어 올리는데) 그들이 쏟아 부었던 그간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여성의 상황에 적용해본다면, 이 구절은 여성이 예수의 말씀에 나오는 종처럼 어떤 형태의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그들의 일과 성취에 대해 자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부과된) 수많은 의무를 겸허하게 수용하라는, 곧 그들이 오랜 기간 들어온 거의 위험하기까지 한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도, 당신은 여성에게 그들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라고 충고할 수 있겠는가? 이에 더해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고 있는 노예제의 비인간화와 생명을 앗아가는 시스템의 폐혜가 횡행한 상황에서, 당신은 어려움 없이 모든 크리스천 동료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종으로 여기라고 권면할 수 있겠는가?
기적과 노예는 내가 크리스천 믿음의 본성에 관해 성찰할 때, 그 즉시 나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리스도의 이 두 말씀은 믿음에 관한 크리스천 이해의 어떤 중심적인 면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논쟁들은 타당하고 중요한 반응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들이 성서가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을 더 깊게 그리고 자세히 살피는 것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에 관해 신학적 핵심 이슈를 얻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크리스천의 믿음에 대한 의미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앙이 반영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의미 안에서 뜻을 살펴보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그들에게 큰 믿음을 달라고 간청한 이 구절에서 허용된 믿음은 선물이다. 믿음의 성장은 더 신앙성숙을 위한 10단계 프로그램의 결과가 아니다. 믿음과 그것의 성장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말씀에서 참된 기적은 자연법칙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현존인 것이다. 그 믿음이라 함은 누가 기자가 그의 복음서 시작에 진술한 것으로 “불가능은 없다”라는 구절과 함께 하나님의 구속을 취하고 있는 그 믿음을 가리킨다.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서는 어떤 지식뿐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내 안에 성령께서 창조하시는 전적인 신뢰”에 참된 믿음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제자들이 더 큰 믿음을 구할 때 그들 앞에 고난의 시절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서 예수는 그의 신실한 추종자가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그 믿음의 강함에 의지하거나 그 믿음의 약함에 위축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따르는 그 분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대답으로 작은 어떤 것, 즉 겨자씨 크기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예수를 따르는 이는 그런 의미 안에서 그의 믿음이 자기 것이 아니라 그와 그리스도를 구속하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진실한 기적이다.
오늘 본문의 두 섹션의 메시지를 요약해 보자면, 크리스천 믿음은 이상하고 퇴보적인 게 아니라 희망차고 믿을만하며 심지어 약함 가운데 강함으로, 놀라움으로 그리고 쾌활하게 활동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믿는 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분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정말로 복음이다.
주석적 관점
-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대답(5-6절)과 쓸모없는 종의 비유(7-10절). 첫 번째 부분은 마태17:20과 병행구이고, 두 번째 부분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이다. 각 부분의 구성요소와 덧붙여 주석은 반드시 왜 그리고 어떻게 누가가 이 복음서 부분에 이 둘을 같이 가져와 배치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첫 번째 부분의 맥락은 마태에서의 맥락과 전혀 다르다.
- 마태 17:14-21에서 예수는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여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마17:20)라고 말한다. 예수는 계속해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하신다(연장하면 귀신도 쫓아낸다는 것이다). 누가에서는 대조적으로 이미 눅9:37-43a에서 사용했기에 제자들이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없다. 대신에 누가는 용서에 관한 두 가지 말씀을 겨자씨에 관한 말씀 앞에 둔다(눅17:3-4 마18:15,21-22). 비록 대부분 학자들이 3-4절과 5-6절의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 비약이 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믿음의 요청과 용서의 필요를 병렬해 놓음으로써 누가가 다른 데서 그랬던 것처럼(8:40-56 유명한 예)이 둘을 연결시키려 했다.
- 이 본문에서 제자들은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에게 믿음을 더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연결을 연장해서 돌아보면 믿음없이 용서하는 것은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게 되거나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게 되는 어려움에 처한다(1-2절). 결과적인 의미는 강력하다. 마태가 치유를 위해 믿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누가는 용서에 믿음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용서하는 데 믿음이 필요하게 한 것은 제자도의 기본과 관계가 있다. 용서한 제자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10절)라고 말할 것이다.
- 이러한 생각은 비유의 둘째 부분에도 나타난다. 이미 5-6절의 믿음에 관한 말씀과 앞서 3-4절의 용서에 관한 말씀의 연결을 보았다. 이 말들과 무익한 종의 비유를 연결하는 것은 10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예수는 듣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비유를 그들에게 적용한다. 누구에게 말한 것일까? 이야기 구조로 보면 5절에는 사도, 1절에는 제자들로 나온다. 그런데 중요한 전환이 비유 자체에서 일어난다. 7-9절에서는 청중들이 주인으로, 10절에는 종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비유를 들은 자들은 “내가 쓸모없는 종”이라 하지 않고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라고 말한다. 관심은 공동체에 있다. 1-2절에서는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고, 3-4절에서는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해 주어라고 제자들을 꾸짖고 있고, 5-6절에서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믿음에 관해 말한다.
- 비유 자체에서 여러 가지 난점이 있는데, 10절의 헬라어 형용사 archreios의 번역부터 시작하자. NRSV는 가장 흔하게 특히 종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쓸모없는”이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하루 종일 여러 가지 일을 한 종을 정상적 의미에서 “쓸모없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래서 다른 주석자들은 다른 번역들 “가치없는” “불쌍한” 또는 “무익한”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러한 대안도 말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바꾸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너무 archreios번역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 그렇다고 주인/종에 함축된 의미로 하나님과 인간 또는 하나님과 신자들을 말하는 것도 문제이다. 많은 예수의 비유나 말씀들은 종종 이러한 해석을 따른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눅12:35-43; 14:15-24;16:13의 예를 보라) 더구나 쓸모없는 종의 비유는 유대인의 경건과 공명한다. 그들은 토라의 명령을 이루도록 창조되었기에 그렇게 한다고 보상은 없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어떤 사람들은 비유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 잘못된 프라이드를 정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유가 초기형태에서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누가가 여기에 배치한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을 말하는데, 거의 반어적인 의미이다. 종의 의무가 명령받은 것을 행한 듯, 제자의 의무는 용서하는 것인데 용서하는 데 누가의 이해로는 믿음이 필요하다.
목회적 관점
누가 더 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을까?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우리의 죄책감은 예수의 놀리는 듯한 대답을 듣고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너희에게 이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예수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모으고 말한다, “너희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과 함께 풀이 죽어서 우리가 야단맞을 만하다고 인정하고 참는다. 우리가 예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무너지는지를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는 것이다.
여기에 설교자들을 위한 목회적 쟁점이 있다. 그 길을 따라오면서 어딘가에서, 성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약이 되는 꾸짖음을 기대하는 데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종종 우리는 제자들에게-그러므로 우리에게-예수가 화가 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사실 회중과 그들의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들을 때 얼마나 자주 가혹한 어조로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지 놀랍다. 이런 가장된 어조는 오늘 10월의 아침에 수많은 우리의 예배자들을 쫓아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그들에 대해 잘못 사용해서 생긴 상처들을 가져온다.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가 온통 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인식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 사이에 장벽으로 세워진다.
성경의 말씀들을 읽을 때 어조의 전체 영역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예수가 사도들을 전혀 꾸짖고 있지 않다면 어떨까? 만약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 없음 때문에 혀를 차거나 고개를 가로 젓지 않았고, 그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포기한 사람으로서, 격려와 사랑의 음성으로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이러한 새로운 귀를 가지고 다시 들으면, 예수가 친절하게, 그리고 아마도 미소를 지으며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예수가 말한다. “이 정도의 믿음으로(다시 그의 엄지와 집게 손가락을 조이면서) 충분하다!” 우리가 예수가 사랑의 음성으로 하는 말을 듣는다면, 그가 사도들에게, 사실은 그들이 이미 그들에게 충분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성서정과 앞에 나오는 구절들(1-4절)을 보면, 제자들이 왜 더 많은 믿음을 요청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이라고 방금 말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실제로, 형제나 자매를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보다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 만약 그들이 잘못하면, 그들은 바닥없는 용서의 우물로부터 끌어올려질 것이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외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거기 이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예수는 질문을 “얼마나 많은 믿음이면 충분한가?”에서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로 바꾼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미지와 이야기를 통해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에게 필요한 믿음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제 그 목적을 성취하라: 그렇게 살라.”
예수는 겨자씨 비유를 가지고 믿음은 계량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후, 주인과 종의 비유로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서방 세계에서, 노예제도에 대하여 예수가 말한 것처럼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해방되기 전 몇 년 동안 하인으로 일하는 사회라는 상황 속에서 이 이야기를 고려해 보면, 예수가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인이 단지 자기 할 일을 했다고 해서 축하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느냐고 예수는 묻는 것이 아닐까? 하인이 그가 하도록 되어 있는 일을 했다고 보상을 받아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예수가 설명하는 것은 상호 책임과 기대라는 특징을 가진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 주인은 종이 자기 의무를 다할 거라고 기대하고, 다음으로 종은, 자기들이 할 일을 마치고 나면, 먹을 것을 받고 쉬고 보호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런 식으로 믿음을 이해하는 것은, 믿음을 삶의 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면서 의무감과 기쁨으로 그렇게 한다. 우리는 복종하는 삶을 산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가 노래한 것처럼, “주님의 증거가 너무 놀라워서, 내가 그것을 지킵니다”(시 119:129).
다시 말하면, 누가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는 묻는 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사는가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죽음의 골짜기로 인도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거듭해서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초인적인 믿음의 저장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셔서 그것이 신실한 공동체로 풍성하게 흘러가게 하시기 때문이다. 신앙의 섭리에서, 섬기는 우리는, 우리가 복종하기를 기대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자비로운 주인에게 의존한다.
신앙을 이렇게 보는 것은 교회를 모든 종류의 실수로부터 구해준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서 믿음은 개인적인 용기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서로에게 관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함께 있다는 것을 배워가야 한다. 이런 신앙을 살아가는 공동체는 질문을 하는 것이나 의심을 표현하는 것이나 혹은 약함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형평성을 넘어서는 자비의 가치를 두려워하거나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다가 인내가 닳아서 얇아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섭리에서 믿음은 영적인 놀라움이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 창고에 비축되지는 않지만, 정의롭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한다.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 한분을 신뢰하면서 우리는 믿음이란 계량될 수 없고 단지 제정될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나 혼자 살겠다는 어떤 환상도 포기한다.
이런 신앙의 섭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우리가 감히 상상한 것 이상을 발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함께 걸으면, 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시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너무너무 놀랍게도 우리 모두의 의로운 주인이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려고” 오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설교적 관점
-누가복음 17:5-10에 나오는 이 두 개의 짧은 이야기는 신약성서학자 Markus Barth가 늘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만일 여러분이 본문에서(the text) 말씀을(the Word)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본문의 잘못이 아니다. 가서 다시 시도하라. 더욱 깊게 파라.” 처음 본문을 읽을 때 설교자는 겨자씨와 주인과 종 이야기를 분리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둘 중 어느 한 쪽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Increase our faith)라고 요청한 것에 대한 응답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각각의 구절은 오늘날의 문화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지혜로운 설교자는 열심히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만일 겨자씨 만한 크기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너는 풍경을 바꾸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나무를 옮기는 장면]. 마태는 이것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해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 이야기 곧 작은 씨앗, 놀라운 일을 성취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은 쉽다. 내가 어렸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보석은 겨자씨 팔찌였는데 그것은 확대경 역할을 하는 투명한 유리 속에 작은 겨자씨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에게 있어 그 팔찌는 매우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굉장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어머니의 능력을 상징하였다. 사실 위대한 일들은 꿈을 꾸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으로 자신 안에 있는 그 꿈을 성취하려 애쓰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교회에 기반하여 진행되었던 Martin Luther King Jr.와 시민운동을 생각해보자: 무장한 경찰, 경찰견, 물 대포 그리고 인종분리를 지지하며 이 시위를 위협했던 군중들을 마주했던 비폭력 저항자들 또 아파트헤이트(apartheid)라는 끔찍한 인종차별을 반대하며 국가권력에 맞섰던 Desmond Tutu 주교를 생각해보자. 또 라이프찌히와 드레스덴에서 그리고 동베를린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던 공산주의 정부에 저항하면서 찬송을 부르며 촛불을 들고 교회에서 물밀 듯이 나온 사람들.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있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과 남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설교자가 기억할 가장 중요한 일은 주일 아침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일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되지 않고있는 신실한 어른과 어린이라는 것이다. 진실하게 믿음으로 한 기도는 25년간 일했던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해고한 교인에게 또 악성 종양으로 판명된 한 여인에게는 헛된 것처럼 보인다. 매 주일 강단 아래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절망한 사람, 낙심한 사람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번영을 말하는 설교자로부터 그 이유가 그들 자신에게 잘못된 점이 있다고 듣게 되는데 그것은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내 목표를 위해(그 목표가 무엇이든간에) 일한다고 말하는 것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겨자씨 이야기가 처음 읽을 때 즐겁고 긍정적이었다면, 주인과 인정받지 못하는 종에 관한 이야기는 불편하고 난처하게 들린다. 나는 그가 노예였는지 혹은 종이었는지는 학자들에게 맡겨두려고 한다. 헬라어 둘로스 (doulos) 둘 다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NRSV를 따라서 “노예” (slave)라고 한다면 미국문화에서 이 용어가 얼마나 깊이 그리고 비극적인 면을 담고 있는지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제자들은 예수께 믿음을 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는 그들에게 묻는다: “만일 네 노예/종이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네 식탁에 앉으라고 초대하겠느냐? 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다. 노예는 노예다. 너는 그에게 저녁을 준비하고 시중을 들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후에나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가혹하고 당혹스럽고 고마움을 모르는 말이다. 여기에 중요한 전환점이 있다. 7절에서는 제자들을 주인과 동일시하여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10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그 노예와 즉 결국 자신의 임무를 단순히 수행한 사람과 동일시 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것을 요청한다.
몇몇 학자들은 “쓸모없는 종들”을 주석적으로 혹은 총체적으로 잘못된 번역이라고 말한다. 설교자가 기억해야 할 점은 복음은 어느 곳에서나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고 인정을 해주는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미국 흑인들이 1960년대 시카고 남부 어느 극장에 모여 정치적 행동을 위한 예배를 드릴 때 그 순서에는 언제나 “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이다-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한 사람이다”라는 노래가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기억하는 일이고 또 자신의 태도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이 지닌 관습적이고 문화적으로 강요된 태도와 비교해보는 일이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눅 22:27)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는 이들을 “쓸모없는 종들”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가장 놀라운 섬김의 정신(servanthood)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자신이 잡히던 날 밤 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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