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6장 1 ~ 13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8. 3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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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매우 심각한 신학적인 난제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중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이 비유의 주인공인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는 권고이다. 그 외에도 많은 복잡한 주석적 문제가 있으므로 본문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 비유 자체는 8절에서 끝날 수 있었는데, 계속 이어지고, 놀랍게도 주인이 청지기가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슬기(shrewdness) 때문에 그를 칭찬한다.(8a) 그리고 같은 절에서 “슬기롭게”라는 주제어를 통해 이 비유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이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는 훈계가 – 아마도 다른 출처에서 나온 것 같은 - 이어진다. 10~12절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또 나온다. 청지기의 불의한 행동에 관한 책망(2)이 그를 본받으라는 명령에 의해 무효화 된다. 13절은 이 비유의 결론적 교훈에 해당하지만, 그 내용은 이 비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본문에서 보게 되는 부조화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가 책상 위에 예수의 말씀에 관한 자료를 기록한 많은 카드를 쌓아놓고, 관련되는 주제나 주제어에 근거해서 비유와 경구를 연결하면서 복음서를 쓰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16:1-13에 나오는 다양한 텍스트의 층위들은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편집-비평적 고려를 하고 나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최종적인 본문과 신학적인 씨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호감을 갖게 되는 인물과 무리하게 편향적으로 포장된 해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오늘의 비유는 바로 앞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와 연속성이 있다. 두 비유는 상급자의 재산을 탕진한 (15:13; 16:1) 종속적 인물(아들/청지기)이 마지막에 환영/칭찬받는 이야기이다. 두 비유가 외형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차이가 두드러진다. 청지기는 아들처럼 참회하지 않는다; 부자는 아버지처럼 낭비한 청지기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슬기에 대해서[] 칭찬한다; 독자는 탕자의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수긍하게 되지만,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이 본받거나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마도,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는 이 비유가 탕자의 비유보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 것이다. 이 비유도 (불의한)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는가?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쫓겨날 신세가 되고 나고 나서 주인의 재산을 더 낭비한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보존하기 위해 주인의 재산을 주위에 살포한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청지기는 부가 자신을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신뢰한다. 빚진 자들에게 그가 선물을 준 것은 그들을 빚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도리어 신세를 갚아야 하는 책무를 부가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주고받는 선물처럼, 청지기가 준 선물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연결망 속에서 선물을 받는 사람을 속박하는 기능을 함으로, 선물의 원래 의미를 상실했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첫 번째 예상 밖의 사건은 주인이 청지기를 야단치기는커녕 그를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9절에서 예수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 우리가 그를 본받으라고 명하는 부분은 우리의 예상을 더 크게 벗어난다. 우리가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정확히 무엇을 배우란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9절 마지막 부분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NRSVS skenas homes로 번역했는데 [공동번역은 “집”으로, 그 외 모든 한글 번역은 “처소”로 번역] 그 본래의 뜻은 “장막”에 더 가깝다. 이 단어는 4절에 나오는 “집(oikous)”이라는 단어와 대조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집이 아니라 장막을 보상으로 언급했다. 예수는 불의한 청지기가 원했던 안전하고 안락한 집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도리어 방랑자, 난민, 순례자들과 같이 최소한의 소유를 보유한 사람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처소를 약속했다.

  아마도 이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예수는 우리가 부정한 청지기처럼 재산을 버리기를 원하신다그러나 이는 우리가 처분한 재산으로 다른 사람을 속박하여 유익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부가 우리에게 안전과 안정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기 위함이다우리가 거룩한 낭비를 통해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소유에 의해 소유되지 않은 삶순례자의 삶유목민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Walter Brueggemann이 말한 것처럼 복음서의 중요한 역설적 통찰력은 “놓아 주면 지키고지키려고 하면 잃게 된다”는 것이다이 비유는 우회적으로 이런 교훈에 도달하게 함으로 “두려워하지 말아라적은 무리여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라는 누가복음 12:32의 뜻을 강조한다이런 관점에서 이 비유를 읽을 때 16:10-12에 나오는 “충실(faithful, 신실)”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모든 것을 제공하시는 분에 관한 신뢰>로 초대한다이것은 부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참된 부”(16:11)와 “하늘의 보물”을 소중하게 여기는그런 믿음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본문을 읽을 때 불의한 청지기의 문제는 그가 주인의 채무자에게 선물 공세를 했던 점이 아니고, 그 선물이 불순한 숨겨진 동기 - 나중에 돌려받으려는 – 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는 청자에게 청지기가 재산을 버린 것을 본받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이 땅의 <준 만큼 받는 경제원리>에 의존하여 안정적인 거주지를 얻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적 삶의 원리를 따라 영원히 움직이는 “영원한 장막”을 얻으려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 예수의 비유 중에서 “불의한 청지기”(그를 “영리한 관리자” 또는 “신중한 회계담당자”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비유만큼 해석자를 어렵게 하는 비유도 없다. 이야기는 부가 최고로 중요하다는 맥락에서 전개된다. 16장은 부자의 청지기가 “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리는 것으로 시작한다(1). 제자들에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한다(13). 장 중간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나오고(14),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는다. 16장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9-31)로 끝난다. 그래서 주제는 분명히 돈과 관계가 있다.

- 부자에겐 청지기가 있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또는 잘못 관리했다). 그것이 분명해지면 그는 해고될 것인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 분명히 약싹 빠른 성격으로 그는 자기 주인에게 기름과 밀을 빚진 두 사람을 불러 빚진 총액을 깎아 주었다. 두 사람의 구입비용을 깎아준 것인지, 또는 단순히 주인에게 빚진 액수를 낮추어 주었던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어떤 경우든지 두 사람은 경비를 절감했고 결과적으로 청지기 자신에게 빚을 지게 했다. 정산하는 시간이 되자 부자가 자신의 청지기가 한 일을 알게 되었고, 놀랍게도 이 일로 그를 칭찬한다.

- 그런데 예수는 이를 제자들에게 적용하여 교훈을 주면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가 말한다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결론 내기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9)고 한다문제는청지기는 어떻게 해 왔으며그의 주인의 칭찬을 듣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이다.(비유는 명백히 9절에서 끝난다그는 그의 주인이 빌려준 이자를 감해줌으로써 주인을 속인 영리한 사람인가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명기 23:19-20에서 금지한 이자를 면제시켜줌으로 빚의 규모를 줄여줄 수 있었다만약 그렇다면그는 영리할 뿐만 아니라 정당하게 행동한 것이다그렇지 않다면청지기는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빚의 규모를 줄여주는 지혜로운 행동을 한 것인가그렇게 함으로 비록 그의 임무는 포기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 빚진 사람들의 호의를 얻게 된 것이다이런 두 가지 가능성은 주인의 칭찬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특별히 비유가 9절에서 끝나고빛의 자녀들에게 부에 대한 경고의 충고(8-13)로 이어졌다면 말이다.

- 10-13절의 예수의 결론적인 말씀은 한 사람이 가진 물질적 소유와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충실함과 책임감이 제시된 덕목이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한다.(13)

- 세 번째 가능성, 즉 청지기가 단순히 주인을 속이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주인에게 진 빚을 깎아 주었다면, 이야기의 전개 상 납득은 되지만, 주인이 왜 청지기를 칭찬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면 칭찬의 이유는 “불의한 청지기”가 영리하게 행동한 것이 되고, 이것이 “빛의 자녀들”의 모범이 된단 말인가? 앞의 두 가지 가능성이 더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물론 우리는 청지기가 그의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존슨이 주장하듯, “달리 말하면, 청지기는 청지기의 자질을 가진 것으로 칭찬받은 것이다. 칭찬받은 것은 그의 행동의 도덕성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민감성의 자질이다. 빛의 자녀들이 발전시켜야 할 영리함이 바로 자신의 세대가 맞서고 싸워야 할 이슈 특별히 물질적 재화의 문제에 대해서이다. 이 세대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보다 그들이 당면한 위기에 관해서 더 지혜롭게 행동한다. 누가의 예수가 이 장면에서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공동체가 했던 행동들이 아닐까(2:42-27)? 16장의 예수는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진실을 되풀이한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

- 13절은 이 사안을 평범한 견해로 정리한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탐욕은 금방 우상숭배로 변하게 되고 이스라엘백성들의 기본적 약속을 깨드리는 결과를 가져온다(20:1-3;6:4-9). 야훼 아닌 다른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들을 이집트에서 나오도록 인도하신 하나님 대신에 맘몬을 섬기게 된다.

- 16:1-13은 성경에서 가장 주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비유와 구린내 나는 주창자들에 대한 예수의 긍정적 태도는 믿음으로 볼 때까지는 만족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 중에 아마도 우리가 가장 희망하는 것은 해결의 추구를 위한 우리의 참여와 성경에서 어려운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싸움이 이 세대의 빛의 자녀들 간에 힘들지만 가장 친밀한 우정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가르침의 방식으로서 비유의 힘은 그것이 민중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비유는 인생의 평범함을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과 연결하는 민초들의 교훈이다. 비유들은 보통 우리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선명한 통찰력의 선물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이해하기 어렵고 설교하기 어렵다. 설교자가 해석하기 위해 애쓰는 바로 그 때, 독자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분투하도록 남겨진다. 결국 양쪽 모두 좌절한다.

왜 예수는 믿음이 깊은 생활을 위한 예를 그렇게 불쾌하게 만들었을까? 비유는 그의 인생이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가 가르쳐 온 것과 정반대되는 사람을 우리 신앙의 모델로 제시한다. 예수는 게으르고 비열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기꾼 청지기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를 짠다. 그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사적인 이익을 취한다. 청자인 우리는 이 악당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 기울인다. 그리고 주인이 마지막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결말은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악당이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은 성공한다. 그가 전에 재산을 잘못 관리해주었던 그의 전 주인은 지금 그가 영리하다고 그를 칭찬한다. 독자는 청지기가 그의 잘못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믿기지 않아 탄식한다. 교훈은 사라졌다. 모욕에 더해서 마지막 충격이 남아 있다. 이 비유는 이런 말로 끝난다: 악당은 가지고, 신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 비유에 속죄나 구원에 관한 내용이 있는가?

다른 상황에서 예수는 미심쩍은 성격의 사람이 가진 긍정적인 성품을 강조하는 비유를 이야기한다. 누가복음 11:5-13에서 예수는 예상치 않게 찾아 온 친구를 먹이려고 한밤중에 이웃을 찾아가서 빵을 요구했는데 환대받지 못한 어떤 사람의 비유를 말한다. 문을 계속 두드리는 것이 기분 나쁜 이웃을 일어나게 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으면 엄청나게 불편했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훨씬 더,” 예수가 말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11:13). 누가복음 18:1-8에서 예수는 불의한 재판관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존중하지 않으며, 또 다른 “훨씬 더?”로 이야기를 마친다. 예수는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불쾌한 이야기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훨씬 더” 라고 비교하는 것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이 미심쩍은 성격을 가진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가 부정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이 사람은 그에게 맡겨진 것을 더 큰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이해했다. 신자들이여, 주목하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부를 관리하도록 위임되었다는 것을 얼마나 더 이해해야만 할까?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청지기는 그의 현재 상황에서 그가 변제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변제했다. 그는 미래에 그가 원하는 곳에 있기 위하여 오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해했다.

솔로몬은 그의 잠언에 이렇게 썼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진다”( 29:18). 청지기의 비유는 특별히 더 큰 그림의 비전을 잃어버린 기독교인이나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그들은 무엇을 하라고 부름받았나?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모를 때, 우리 앞에 있는 보석은 거의 전혀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들이고, 물건들은 그것들에 대한 필요성보다 더 큰 가치를 갖지 못한다. 이런 물건들은 너무 쉽게 사용되고, 남용되고 조작되는 대상이 된다.

오늘 본문을 조금 다르게 읽어보자예수가 이 비유를 말씀하신 무리들 가운데누가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하는(14바리새파 사람들이 있다선택된 백성들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보물의 관리자인 그들은 불의한 청지기와 같았다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비전을 잃어버렸다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현재의 보물의 종이 되는 것으로 바꿔버렸다부와 돈과 심지어 자기만족에 의해 제어된 채로그들은 사회 속으로 혼합되고 그들의 비전을 잃어버렸다이런 일들에 대해 예수가 13절에서 말한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당신은 이 시대를 섬기고 그 보물을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그러나 둘 다를 할 수는 없다하나는 죽음으로 인도한다다른 쪽은 생명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불의한 청지기의 역할을 어떻게 해석하든, 주님의 빛 안에서 걷는 자녀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비전을 위임받았을 뿐 아니라 왕의 보물을 받았다! 이 시대에도 이 세상의 불완전한 보물들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을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 선물들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의 빛 안에서 사용해야만 한다.

이 비유는 자녀들이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한 영원한 관점을 잃어버렸다고 경고한다. 너무 쉽게 우리는 현재의 삶을 장차 올 나라에서 분리시킨다. 얼마 전에 우리는 외쳤다. “그는 살아계신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분명하게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속삭인다.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 어딘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를 멈췄다. 우리는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고, 삶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온 길 어딘가에서, 우리에게 강하게 요구하는 것을 섬기는 것이 쉬워졌다: 사람들, 일정, .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비전은 흐리고 혼란스러워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멈추고 살아남은 자가 모든 걸 차지한다는 정신나간 심리 상태를 가지게 되었다. 어딘가에서 도전은 대답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서 무엇이든 남겨진 것들을 구하고 좀 더 위대한 것을 위한 삶에 관해 잊어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묻었다.

예수가 그의 비유에서 말한 것은 위기에 대한 것이다.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위한 비전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책임에 관한 스스로 만족하기는 쉽다. 비유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로잡고 우리 위에 있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오늘의 비전을 갱신하라고 우리를 부른다.

설교적 관점

 -이 비유에 대한 관점과 해석은 아마도 읽는 독자들 수만큼 많을 것이다. 이 비유는 성서에 대한 최고의 그리고 가장 창의적인 해석자들도 혼란스럽게 해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소리의 톤을 듣고 그의 눈을 보며 또 그의 청중들의 일상생활의 현실을 경험한다면 [이 비유를 말한] 예수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상황이므로] 이 비유가 지닌 여러 가지 가능한 의미들을 두고 혼란에 빠지기 보다는 설교자는 한 관점에서 시작하여 창의적 해석과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여기 이런 면에서 이 비유를 접근할 세 가지 관점을 소개한다.

진실로 정직하지 못한 것(True Dishonesty)

8절로 인해 이 비유에 붙여진 전통적인 제목은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여기서 정직하지 못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른 뉘앙스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 당시에 그리고 지금도 군중 가운데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가난한 자들은 생산물에 엄청난 양을 요구했던 부유한 지주와 매번 과도한 세금을 강요했던 로마정부의 자비를 언제나 필요로 했다.

이 비유에서 소유주는 그의 청지기를 단순히 소문에 근거하여 잘못하고 있다고 문제삼는다. 그래서 곧 해고될 것을 알고 이 청지기는 “부정직하게” (dishonestly) 주인에게 진 빚을 감하여주는 방식으로 대처한다. 이런 상황을 말하면서 아마 예수는 이미 심각하게 정의롭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시스템에서 정직하게 살 수 없는 처절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비유를 말하는 것 그 자체가 가난한 자들을 매일 속이고 착취하는 총제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시스템을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청지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차가운 곳에 남겨 두었을 이 시스템을  날카롭게 심판함으로써 현명하게 행동했다. 그의 주인은 정직하지 못한 점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명함을 칭찬한다. 9절에서 불의한 재물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분명히 부유한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청지기는 자신의 부정직한 행동으로부터 어떤 금전적인 이득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정직하지 못한 재물과 그로 인한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윤리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사회,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경제제도가 윤리적인 삶을 어떻게 어렵게 만드는 지를 가능하다면 몇 사람의 경우를 들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의 도구(방식) (Masters Tools)

Audre Lorde는 그녀의 책 Sister Outsider에서 “주인의 도구는 결코 주인의 집을 해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유명한 에세이를 썼다. 그녀는 주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 그리고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불가분한 관계등을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그녀의 주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청지기는 부채를 삭감하여 주인에게 있어서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어떤 면에서 이 청지기는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내다보는 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를 축적하는 주인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부채를 삭감함으로 그는 현존 납세구조의 불공정함을 사실상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는 부채를 삭감해주고 스스로 그들과 [채무자들] 연대를 함으로써 부채를 발생시키는 현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로빈 훗처럼 현명하게 시스템을 무력화시킴으로 억압구조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예수가 말한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삶과 관계들을 그릴 수 있도록 돕기위한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억압적 시스템을 유지하는 “도구”(tools)은 무기력하게되고 현 질서가 뒤집어진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채는 탕감받고 고용된 노예는 자유하게 된다. 이 비유는 희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이끌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데 그 때에는 경제적 삶은 평등하게 되고 불평등은 사라지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은 주인의 도구(방식)으로도 아니고 세상의 방식에 의해서도 아니 자본주의의 방법으로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끊임없이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가능하다.

재원(財源)과 관계 (Resources and Relationships)

이 비유에 대한 마지막 접근은 재원과 관계의 연결을 성찰해보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청지기를 움직였던 동기라는 한 통찰력을 보게된다. 그의 목표는 친구들을 만들어서 해고되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받아주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Christine Pohl은 “이익과 손실” (Profit and Loss)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이 비유가 우리들의 돈에 대한 사랑이 편만해있는가를 잘 드러내보인다고 말한다. 그녀는 “예수는 청지기의 행동을 칭찬한 게 아니고 재원과 관계사이의 연결고리를 본 그의 통찰력을 칭찬하였다. 우리가 행하는 부와 경제행위를 생각해볼 때, 심지어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수단까지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이 신선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청지기의 통찰력은 재원과 관계사이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음을 보여준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떤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구축하려는 관계 배후에 있는 우리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관계들이 경제적으로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 아마도 보다 노골적인 질문은 우리의 관계는 계급 문제(class issues)과 관련하여 어떻게 형성되고 또 예수께서 그렇게 자주 언급한 “이들 중 지극히 작은자” (least of these, 25:40. 45)와 우리의 삶 속에서 연대를 가지려면 무엇이 일어나야만 하는가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언제나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의 마지막 말은 (그것이 원래의 비유에 속해있던 그러지 않건 간에) 예수께서 단호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을 종합하는 말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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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1 ~ 3절, 1 1 ~ 32절  (0) 2022.08.21
누가복음 15장 1 ~ 10절  (0) 2022.08.21
누가복음 14장 25 ~ 33절  (0) 2022.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