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적 관점
-후에 찬송가가 된 어느 시 전체를 읽는 일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본래의 것에 놀라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내가 파버(Frederick Faber)의 찬송 “넓으신 하나님의 자비” (There’s a wideness in God’s mercy)전체를 읽었을 때 나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대로 그 찬송을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다처럼 넓고, 그의 공의로우신 자비는 자유보다 더 크고...” 이 찬송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리고 “의인들을 위한 은혜”를 그리고 “풍성한 구원”과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 안에는 대부분 찬송가처럼 운율이 있지만 때로 이런 구절을 노래할 때는 운율을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우리들의 잘못된 제한으로 너무 좁게 만들었네. 우리는 그 분이 가지고 있지도 않는 엄격함을 열심히 과장하였네. 우리를 당신의 발 앞에 모으고 오게하는 구원자인 주님처럼 이렇게 젠틀하면서도 좋으시고 친절한 목자가 있을까?”
-이러한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사랑, 은혜, 연민 그리고 공의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의 근거가 된다. 이 비유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향한 깊은 바램, 크신 기대 그리고 열정적인 꿈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조화 그리고 교제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하셨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든 그 저변에는 이런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 피조세계 그리고 서로 간에 사랑의 관계에 있을 때에는 이들이 낙원에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 최초의 관계가 깨어지고 파편화되어 왜곡되었을 때 그들 상호관계와 피조세계에 대한 관계가 마찬가지로 깨어지고 파편화되고 왜곡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났을 때[관계의 파괴]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나 있음을 발견한다.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고, 화해시키고 치유하며 회복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다. 이것이 탕자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놀라운 힘으로 나타난다.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다. 그는 재산을 분할하여 각자의 몫을 준다. 나는 킹제임스 성경이 서술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 거기서 작은 아들은 “방탕하게 살면서” (riotous living) 모든 것을 허비하였다.
-이 이야기 속에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이 탕자는 깨어지고 일도 없고 배고프고 또 집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는 상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형제가 얼만큼 집에서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몇몇 돼지농장에 취직했다고 예수는 말한다. 모세는 돼지는 율법이 허용하는 음식(kosher)이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아무리 선한 팔레스타인 유대인도 돼지 옆에서 죽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이 탕자가 집으로부터 멀리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는 놀라운 전환을 시도한다. 돼지와 더불어 뒹굴고 살던 이 탕자는 “제 정신이 들었다” (came to himself). 그는 이전의 모습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깊은 불연속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그 간극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기대했던 일이 아님을 알게된다. 아버지의 바램을 생각할 때 악몽같은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마음 속에 한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 이것은 오래된 가스펠 송에 반영된 경험과 유사하다: “내 안에 나를 사로잡고 있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단지 무언가 내 안에 있다는 것뿐”.그래서 그는 집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이 탕자는 아버지에게 말할 것을 되풀이하며 연습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이것을 반복하였는데 무언가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발생한다. 아버지가 일반적인 팔레스타인 남성의 규율을 벗어 던지고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관습도 깨어버린다. 그 탕자가 돌아올 때 아직 멀리 있을 때인데 아버지는 그에게로 뛰어가서 그를 얼싸안고 “측은히 여겼다”. 이 아버지는 그의 문화에서 보통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한다. 그는 아들을 환영하며 집으로 데려온다.
-그 때 이 탕자가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팔레스타인 남성문화와 그 규율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시작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아버지가 이해할 만한 말이다. 아들은 당시 사회구조 속에서 호소를 하며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을 마치기 전에 아버지가 개입한다. 탕자가 무슨 일을 하였든 간에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아들이다. 그는 결코 품꾼이 될 수가 없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 비유는 탕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결정적이고 자비로우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보여주려는 것이 분명해진다. 결국 이 비유는 하나님의 크신 관용과 깊고도 넓은 사랑, 연민과 정의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넓고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투투주교는 (Archbishop Desmond Tutu) 자신의 저서 God Has a Dream 에서이렇게 쓰고 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도와서 그 일을 이루어달라고 하십니다. 그 일은 이 세상의 추함과 더러움과 빈곤이, 전쟁과 증오가, 탐욕과 거친 경쟁이, 소외와 불화가 변하여 그 반대가 되는 것이며 그 일은 웃음, 기쁨, 평화가 있게 될 때 그리고 정의와 선함과 연민, 사랑과 돌봄과 나눔이 있는 그 곳에서 이루어 질것입니다. 나에게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가족, 인류공동체, 하나님의 가족, 나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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