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에 무관심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 반대로 하나님은 죽음을 적으로 여기시고,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죄를 이기는 것만큼 중요하다. “오 사망아, 네 이김이 어디에 있느냐?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이러한 말들과 함께 바울은 죽음의 힘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승리에 감사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우리의 삶은 죽음을 넘어서도 그대로 계속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그 삶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열쇠들은 주님의 손안에 있지 결코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자라면 그 이유는 그의 손에 이러한 열쇠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당시의 대표적 지성인 그룹인 사두개인들과 맞닥뜨리는 분은 살아있는 주님이다. 사두개인들은 죽음을 넘어선 삶이 연속성에 관한 생각을 거절했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그러므로 삶은 이 땅에서의 시간의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 이후 생존에 관해서 예수의 가르침과는 완전해 반대되는 방식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위해 논리적 덫을 준비했고 예수가 그 덫에 걸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어리석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말한다. 율법을 따라 자기의 형의 과부와 차례로 결혼한 일곱 명의 형제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영생이 있다면 그 형제들과 그 여자가 죽은 후에 그 형제들 중 누가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될 것인가? 이러한 상상적 시나리오는 예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고안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는 그 시나리오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다음과 같은 한 기본적인 사실을 언급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34-36절)
예수가 사두개인들에게 지적하는 것은 영생이 단순하게 유한한 생명이 죽음을 넘어 영원히 연장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죽음 저편의 삶의 실체가 어떤 것이든, 그것이 이 세상의 삶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일을 영생을 통해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선행을 행해야 한다. 약자를 도우며, 삶의 조건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기심에 저항해야 한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히 3:13a)
확실히 예수가 사두개인들에게 던지는 결정적 요점은 이것이다: 죽음은 많은 것들의 끝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끝이 아니다. 한 독일의 찬송가에서 Paul Gerhardt는 이처럼 썼다. “모든 것은 지나 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계신다/ 흔들림 없이;/ 그의 생각과/ 그의 말씀과 그의 뜻은 영원한 기반 위에 서있다.” 우리는 특정한 시간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홀로 영원하시다”(딤전 6:16)
이것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이 하나님은 많은 신들 중의 한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분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가슴 속에 품으신다. 피조물은 어느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다. 우리 인간은 영원하지 않으나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영속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자비는 영원하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그들은 지금 질병으로부터 치유되었고 악으로부터 깨끗게 되었다.
“그에게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 전에 살았으나 지금 우리들 가운데 없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그들은 우리에게도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이전의 시대에만 말한 것이 아니고, 오늘도 여전히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 없이 살 수 없다.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첫 번째 가족이나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 교회의 교인이 된 사람들 중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룬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구성원들에 대해 충분히 알 수가 없지만, 그들 중 몇몇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진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오늘 말해야 하는 것 안에 들어와 어떤 말을 하고 있다면 그들은 산 자의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우리를 앞서간 사람들과의 교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38절)이라는 찬양을 통해 확인된다.
주석적 관점
부활에 대한 질문
- 기원전 200-100년 사이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유대교 초기에 대립되는 분파로서 부활에 관한 믿음에 있어 서로 동의하지 않았다. 사두개인들에 따르면 토라문서(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부활에 관한 교리도, 천사에 관한 믿음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토라문서가 구전 토라에 까지 시대적으로 소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말하자면 구전으로 계속되는 해석의 흐름이 전수되는 것이며 예언자문서나 시편에 나타나는 새로운 믿음과 토라문서가 조응한다는 것이다.
-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들에 의해 다니엘서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인데, 그 책은 지혜와 예언의 전통에 기원전 200년경에 나타난 종말론적 신앙의 전통이 결합된 것이다. 다니엘서에는 천사 가브리엘과(단8:15-17;9:20-27;10:4-9), 미가엘(10:13-21;12:1) 이 나올 뿐만 아니라 최후의 심판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모욕(12:2-3)으로 나타난다는 성서적 근거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특징인 당시의 종말론적 믿음을 채용하고 토라문서의 구전 해석에 관한 논쟁에 참여했다.
-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누가의 버전이 마태(22:23-33)이나 마가(12:18-27)의 버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누가의 버전은 사도개인의 질문(27-33), 예수의 대답(34-38), 화자의 진술과 함께 어느 율법학자의 대답에 초점을 두어 시작, 중간 그리고 결론을 담고 있다.
그녀는 누구의 아내인가?(27-33)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으로 시작한다(27). 모세가 쓴 것을 그들이 참조한 것은 토라문서에 특별히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예수께 대해 신명기 25:5-10에 나오는 모세의 가르침, 역연혼(逆緣婚-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미망인과 결혼하는 관습 창38:8)을 인용함으로 도전한다. 이 계명에 따르면 만약 그의 형이 아이 없이 죽는다면 형의 가문을 잇기 위해 시동생이 그의 형수와 결혼해야 한다. 일곱 형제가 아이 없이 계속 죽는다는 허구적 상황을 만든 것은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를 공개적으로 모욕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왜냐하면 토라에 그 여인이 진짜 어느 형제와 결혼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본문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자의 하나님(34-38)
- 중간의 예수의 대답에도 역시 시작, 중간, 결론이 있다. 시작(34-35)에서 종말론적 사고의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는 것을 도입한다. 예수의 대답의 핵심은 이세상의 육체를 가진 사람이 저세상의 영원한 천상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종말론적 믿음이다. 34-35절에서 예수는 출산이 이 세상의 육체를 낳는 것이지(창2:24;3:16) 저 세상의 죽지 않는 천국의 몸을 낳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 중간(36)에서는 명백한 유대인의 종말론적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부활한 몸은 천사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문장에 누가의 핵심적인 주장이 담겨있다. 구약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다니엘서와 같은 오래된 책인 에녹1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천사에게 아내를 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기에 출산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에녹1서15:37). 천사로 언급되는 창 6:2-4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해하기 위해, 종말론적 저자들은 세상의 사람들을 돌보는 천사들 중에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천사적 존재가 사람들과 아이를 가졌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만약에 여인의 남편이 영원한 천사적 존재와 같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천상에서 그에게 전 아내를 아내로 허락하지 않는다. 누가의 설명은 이러한 믿음을 강조하는데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36)”라고 말한다.
- 예수의 대답에서 결론(37-38)은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천사적 존재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죽은 몸에서 “산자”로 일으키실 때 이러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출3:6에서 주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러졌다면 이것은 예수가 이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과 살아있다”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만 울볍교사들이 예수를 선생이라고 두 번이나 부르고(28), 옳은 말씀이라고 말한다. 마22:33에서 군중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말한다. 대조적으로 누가는 많은 율법교사들이 이 주장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도전적인 질문을 함으로 예수를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누가에게는 이것이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명예롭지 못하고 죄 없는 죽음 전에 공식적으로 존경을 받는 유일한 장면이다.
목회적 관점
누가의 본문은 부활이 없다고 확실히 믿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부활에 대하여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대화에서 질문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다. 지식을 얻고 이해하기 위하여, 상황을 분석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권위에 도전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혹은 논쟁이나 토론에서 이기기 위하여 질문을 한다. 질문이 대화를 설정하거나 재구성해서 종종 상대방을 유리하게 하기도 한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미 검토해보고 거부한 신비에 대해 예수에게 묻는다. 질문은 진지한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신뢰할 수 없고 식견도 없다는 것을 구경꾼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예수는 이 질문을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에 관해 가르치는 기회로 삼았다. 예수는 질문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해 가르치는 기회로 사용했다.
예수는 하늘나라와 이 세상이 어떻게 같지 않은지 설명하는 것으로 질문에 대답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심판이 아니다. 사물은 땅에서 일하는 방식으로 하늘에서 일하지 않는다-하나님 감사합니다! 사회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조차도 하늘에서는 “천사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부활의 자녀가 된다.”(36) 복음이 근본적으로 말하는 것은 천국에는 사회정치적인 계층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늘에도 복음이다. 예수에 의해 계시된 부활의 신비는 하늘나라가 인간성이 말살된 사람들이 복권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해방되고, 천대받던 사람들이 높여지고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재산으로, 남자들의 뜻대로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로 옮겨지는 물건으로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사랑을 하고 사랑받을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부활의 자녀들이 세상에서는 그들에게 금지되었던 기쁨과 평화를 하늘에서는 알게 될 것이다.
예수는 38절에서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새로운 것과 용서와 해방의 하나님. 세상에서 억압받았다고 해서 하늘에서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구속과 예속은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억압을 견딘 사람들과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동성애차별처럼 인간성을 말살하는 체제의 희생자들은 종종 자유에 대한 약속을 찾아볼 수 없는 매일매일의 현실 너머를 보려고 투쟁한다. 억압의 희생자들은 현재 상태가 미래를 언제나 그렇게 되도록 결정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고통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지만, 그러나 신앙은 희망을 공급한다. 북미에서 노예로 살았던 아프리카 민족의 고난과 희망은 믿음을 통해 고난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예로 있는 동안 만들어진 노래인 영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선조들의 신앙을 언뜻 보게 해준다. 이 노래들에서 우리는 2/3짜리 인간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예수의 부활이라는 복음을 개인적이고 열정적으로 아는 사람들과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심오한 희망을 듣는다. “나는 예복이 있네”라는 노래는 노예들의 신학적 상상력의 탁월한 예이다. 이 노래에서 그들은 현재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황 속에 있는 자신들을 보고 있다. 이 노래는 법과 억압자의 의지에 의해 버려지고 외면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 선거권을 빼앗긴 사람, 그리고 과부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는다고 선포하심으로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응답하신 예수의 응답을 되풀이한다. 땅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고, 자녀들과 사랑하는 사람이 종종 먼 곳으로 팔려가는 사람들이 지은 이 노래는 가치와 존엄성이 회복되는 하늘나라를 대담하게 묘사한다. 인간성의 말살과 증오에 저항하며,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예복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예복을 가졌습니다, / 하나님의 아이들은 모두 예복을 가졌습니다. /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 내 예복을 입을 겁니다, / 하나님의 하늘 전체에서 외칠 겁니다.
이 용감한 신앙 선언이 그 자체로는 이례적이지 않은 것처럼, 다음 절에서 작가/가수는 그/그녀의 포획자에게 한 방 먹이고, 불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천국에 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이 그 곳에 가는 건 아닙니다. / 천국, 천국, / 하나님의 하늘 모든 곳에서 외칠 겁니다…하나님의 하늘 모든 곳에서 외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억압당하는 자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자녀는 심지어 죽어서도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이 지혜를 얻었고, 우리의 전통에서 이 신앙과 믿음의 예를 가졌고, 여기 이 땅에서 기독교인의 여정을 걷는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하여 강해진다. 부활은, 우리가 부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을 경험한 것처럼, 특별히 가장 작은 자, 잃어버린 자, 버려진 자에게 명예와 존중의 장소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예복이 있다.”
설교적 관점
-회중을 위해 성서를 해석하는 설교자들은 예수께서 눅 20:27-38에서 같은 일을[성서해석] 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예수의 권위에 대해 그리고 그의 말을 가지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시도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한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에 관한 질문(25절)에 대해 예상하지 못했던 예수의 대답에 놀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침묵을 지켰고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성전파괴와 더불어 사두개인들은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요세푸스는 그들을 부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엘리트 그룹이라고 서술하였고 백성들로부터는 미미한 신뢰를 받았다. 그들이 예수께 질문하는 것을 통해 아마도 이들이 일반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을 주의깊게 읽는 독자들은 사두개인들이 형수수취제(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풍습)에 관한 모세의 가르침을(신명기 25:5-6, 창세기 38:6-11)를 인용하고 또 한 여자가 7명의 형제들과 연속적으로 결혼하는 터무니없는 각본을 들이댈 때 군중들이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33절) 일찍이 농촌에서 형수수취제는 죽은 남편이 남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온정적인 사회적 장치였을 것이고 과부와 자녀들을 위한 가정을 제공한다. 하지만 예루살렘 시의 부유한 사두개인들의 결혼도 이와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예수는 모세가 말한 것과 그들의 성서를 해석해 줌으로써 이들을 가르친다. 사두개인들에게 성서는 토라 즉 모세오경으로 한정되어있다. 그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이라는 말로 (28절)논쟁을 시작한다. 예수는 “모세 스스로 보여주었듯이” (37절) 라고 응답하면서 이들의 전통을 존중해주고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에서 나온 소리 곧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출 3:6)를 해석한다.
예수의 해석은 부드럽고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사두개인의 홈구장 토라에서 그들의 공을 사용하고 그들의 규칙으로 경기하면서 자신의 점수를 얻는다. 이런 현란한 해석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시대의 시민들이 된다. 하나님은 “옛날에 옛날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는데 지금 그들은 나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죽고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하나님은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기를 계속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38b)라고 결론짓는다. 예수는 모세를 부활의 눈으로 해석하는데 거기서 우리의 이름과 정체성은 특정한 가족관계 구성원으로 제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부활의 자녀들”등과 같은 표현으로 무한하게 확대된다(36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 새로운 시대와 삶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들의 순종이나 충실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고 그 약속은 이후 이 이야기를 듣고있는 우리들에게도 상속이 된다.
-사두개인들과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살아감에 있어 그리고 죽음을 직면함에 있어 충분한 희망을 준다. 이 이야기는 부활에 관한 많은 질문에 답을 주지도 않고 새로운 창조에 대한 로드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38절)라는 말은 우리가 직접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궁금한 것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알고 계시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질문이 해결된다는 신뢰를 갖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믿음은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하고 또 결혼식에서 우리가 좋은 처지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서로 사랑할 것이라고 가장 굳건하게 약속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고전 13:8)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에 직면하는 사랑의 쓴 맛에 대해서 알고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구도 속에서 그런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가? 다른 것들이 모두 끝나도 사랑은 죽지 않는다. 이것은 부활의 해석학을 통해 우리 삶의 이야기를 읽어나갈 때 인식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하다는 것 그리고 그 신실함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질문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능히 견딜 수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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