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장 41~44절(38절-13장 2절)“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외식의 결과”
마가복음 12장 41~44절(38절-13장 2절)“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외식의 결과”
(메디윌병원 2017.08.27)
제가 오늘은 돈 얘기를 하려 합니다. 돈 얘기한다니까 얼굴 찌뿌리는 사람이 있는 것 같군요.
오늘 본문은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은 후 바로 뒤 이어서 등장하는 말씀이지요.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말씀의 위치에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모든 본문이 그러듯이 느닷없이 그런 내용이 나올 수 없지요.
본문과 누가복음 21장 1-4절 말씀이 과연 헌금에 관해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외식에 대해서 막 12장 38절이하와 누가복음 20장 45절이하에서 똑같이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40절과 누가복음 20장 47절에 서기관들에 의하여 과부들의 집이 약탈당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며, 명예욕으로 가득찬 서기관들과 진정한 신앙과 경건을 간직한 가난한 과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특별한 보호를 받아할 과부가 하나님 앞에서는 부요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과연 헌금을 말씀하시기 위한 비유일까요?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단순히 생활비 모두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모두 바쳐야 한다는 내용도 아닙니다.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모태신앙인 저는 이제껏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목회자들로부터 본문에 대해 그런 설교를 많이 들어왔지요.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바친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에 껄끄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이렇게 가난한 과부에게도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해야만 그녀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일까요?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말이죠.
왕상 17:8~15절의 마지막 남은 한 줌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아들과 죽음을 준비하던 궁핍한 사렙다 과부에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엘리야가 생각납니다.
정말 철면피 같은 모습으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과부의 마지막 것을 빼앗는 엘리야의 요구는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생각게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스토리의 결말을 알기에 엘리야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순종을 보시고 밀가루와 기름이 차고 넘치게 공급하셨으니까요?
그렇다면 미리 결론을 예측하며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이 과부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도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요?
본문은 여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본문을 보면 그녀의 믿음을 칭찬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모범적인 헌금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혹시 다른 내용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어떤 의미로 주님께서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오늘 나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12장 38-40절에 등장하는 서기관들의 모습은 겉보기에 좋아 보입니다.
겉만 보면 분명 그들은 경건해 보였고 좋은 모습을 하고 있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형적으로 외식하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외식하는 신앙이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동하는 신앙이지요.
이런 신앙은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없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신앙입니다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 것은 실제로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옷으로 경건한 척하려 했던 것이죠.
그들이 입은 긴 옷의 핵심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마음으로 행하기에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신앙입니다.
내 영적인 만족감과 우월감을 보여주고 싶은 교만한 마음이 그 핵심에 있는 것이죠.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직분을 과시하고 스스로 만족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서기관으로서 마땅히 입어야 할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길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서기관들은 경건하게 보이려했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유대인들에게 영적으로 신령한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겉만 그럴 뿐 실제는 그렇지 않았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40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이“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며, 서기관들의 모습이‘외식’에 불과하며 외식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외식은‘겉만 보기 좋게 꾸미는 것’으로‘겉치레’라 하지요.
속은 텅 비어 냄새나는 오물로 가득 찼는데 겉만 번지르하게 꾸며 속과 겉이 다릅니다.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속은 썩어 냄새나는데 겉만 화려 합니다.
이렇게 겉이 화려한 모습을 볼 때 오해하게 되지요.
겉이 속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보니 겉만 보고 착각합니다.
신앙에서 외식은 속에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잘못된 겉만을 보여주지요.
신앙의 경건과 삶은 엉망인데도 믿음이 좋은 것처럼 포장하여 행동합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믿음이 좋은 것으로 오해하여 적절한 신앙교육이 이루어지질 못합니다.
또한 큰 예배당과 많은 성도들의 숫자로 그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교회의 속을 들여다보면 말씀도, 성례도, 권징도 없는, 심지어 복음이 없는 교회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외형인 건물만 보고 대단한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교회의 모임에선 경건하게 보이지만, 세상으로 나가면 마음의 상태와 겉 표정까지 이중적인 모습으로 달라지지는 않습니까?
예배드리는 자세와 세상사는 삶의 모습이 다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가요?
그래서 주님은 41절에서 헌금함을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41절“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예수님께서 지켜보시는 중에 여러 사람들이 헌금을 하고 지나갑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헌금바구니 대신 예배당 앞에 놓인 헌금함을 사용하지요.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함에 무리들이 헌금을 넣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계셨습니다.
여기“보실새”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미완료시제인 계속적인 의미로 “계속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그냥 헌금을 넣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쩌다 한번 슬쩍 보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속 보셨습니다.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째려보고 계셨다 이 말이지요.
헌금을 넣는 광경을 주님이 계속해서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본문에는 헌금함 하나로 표현되지만,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는 헌금함이 13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각기 다양한 헌금의 용도들에 따라 구분되었습니다.
이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고, 돈을 넣는 입구 주둥이가 나팔처럼 생겼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궤라 불렀지요.
이렇게 만든 이유는 드린 헌금을 보호하여 헌금함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입니다.
당시의 화폐는 지폐가 아니라 놋쇠로 만들어져 헌금을 넣을 때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당시 성전을 관리하던 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게 하려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놋쇠로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을 많이 넣으면 쟁그렁 둔탁한 소리를 내었고, 좀 시원찮은 헌금은 떨어지는 소리가 작아 많이 넣은 자와 적게 넣은 자를 구별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오직 두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만 설명합니다.
한 부류는‘여러 부자’요.(41절). 다른 한 부류는‘가난한 과부’입니다(42절).
‘여러 부자’는‘많이’넣었습니다.
반면에‘가난한 과부’는‘두 렙돈’즉,‘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먼저 부자들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많은 헌금을 일부러 떨어트리는 소리를 내며 넣었지요.
상당한 양의 돈이 쟁그렁 소리와 함께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는 부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누가 쳐다보길 기대하여 두리번거리며 당당하게 성전으로 들어가던 부자들,
다음‘가난한 과부’의 차례가 되어 헌금하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두 개의 렙돈을 집어넣었습니다.
쟁소리가 아닌 희미한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조차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정도였지요.
누가 나를 보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채로 들어갑니다.
혹여 이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의식하면 상당히 부끄러워지고, 무안해질 수 있는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이라면 어떤 행동 했을까요?
주님은 44절에서“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것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과부가 ‘가난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가난한’과부가‘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가 얼마입니까?
‘두 렙돈’이라고 말합니다.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1/64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우리 돈으로 500원짜리 동전 두 개인 1,000원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액수로 볼 때 부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자의 헌금보다 이 과부의 헌금을 봐 주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그녀의 헌금을 무시했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주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헌금 이면에 있는 진정한 믿음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두 렙돈이‘생활비’라는 말은 그녀의 형편이 보통 심각한 정도가 아님을 알수 있죠.
하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생활비란, 말 그대로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비용으로 헌금을 드리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 가난한 과부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루를 굶어야 합니다.
하루종일 두 렙돈을 벌기 위해 육신이 지쳤는데도 텅 빈 배를 움켜쥐고 하루 밤을 지새워야 합니다.
내일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오늘 무엇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가난한 과부는 생계를 위해 꼭 필요한 귀한 돈을 바쳤습니다.
이 헌신이 바로 하나님께 전적인 믿음을 보여준 값 비싼 제자도입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만을 의식했던 마음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양이 얼마나 많고, 적으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이것은 과부의 최선으로”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당당한 태도가 헌금을 드리게 된 이유임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예배드리며 대부분 성도들은 헌금을 드리지요.
만약에 맞은편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더라면 아마 헌금하는 모습이나 표정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그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예수님의 시선은 한 여인에게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슴은 아마 흥분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그 시대의 참된 헌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의 한 샘플을 발견하셨기 때문이셨습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헌신의 진정한 본질, 거기서 우리는 참된 헌신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의 구체적인 헌금 사례를 통해 헌금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셨고, 이를 통해 위선으로 본질에서 벗어나 변질된 경건을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헌금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헌신과 섬김이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대표하고 반영하는 것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처럼 헌금은 내 삶의 기반과 근거가 하나님께 있으며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되는 것으로, 나와 내 모든 삶 전체가 내 것이 아닌 오직 주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식하는 서기관들이 가득한 이스라엘에 가난한 과부가 있었고, 그 과부의 가난한 정도는 하루 품삯의 1/64밖에 안 되는 아주 적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야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헌금함 앞에 앉으셨고, 가난한 과부의 형편을 말씀하심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외식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과부를 착취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과부들이 바친 “한줌의 고운 가루”를 작은 예물이라고 경멸했고, 쿰란 공동체의 과부들을 강탈하여 경제적인 궁핍으로 매춘까지 하는 실정이었지요.
그래서 렘 7:6은“고아와 과부를 압제한다며”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를 성경에 기록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과부를 보신 후 그 일에 대하여 누구에게 말씀하셨나요?
누가복음에는 대상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가12:43에 보면‘제자들을 불러다가’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오늘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은과 금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할 돈이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 아닙니까?
또 제자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 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의 심정이 되어 보고자 합니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유대 사람들이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어떤 생각이 먼저 들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정통 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기에,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사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기에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했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 가만있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시는 것일까요?
마가복음 12장38절~40절에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에 이어 41~44절의 두 렙돈 기사가 나온 후 그 다음 장인 13장 1-2절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 21장 6절 똑 같은 구조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막 12장 40절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막 12장 4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그 구차한 가운데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
눅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미고
막 13장 2절 그렇게 장식하여 꾸민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는 말씀입니다.
“이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에게 경고로 시작하여 그 외식과 탐욕의 결과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무서운 책망의 경고입니다”
당시 성전이 무너지게 된 것은 단순히 로마의 침략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탐욕으로 마지막 생활비까지 착취당하는 과부를 보며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성전의 멸망을 불러 왔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전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무너졌고 강도들이 심판받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두 부류에 대해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서기관과 가난한 과부의‘부와 가난’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외식과 그 외식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부류의 사람을 의도적으로 대조하여 서기관들을 꾸짖으십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과 잔칫상에서 높임을 받으려 하는 모습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가난해져 버린 과부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의 물질적 탐욕을 고발하는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권력과 지위와 부를 사랑하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서기관들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서기관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그들을 조심하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막 12장 28절이하를 보면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 모두가 크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본문에 한번 더 분명하게 강조하여 가르치십니다.
서기관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였지만, 정작 그들은 참된 이웃의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이었음을 다시금 깨우치시는 경고입니다.
율법에 있어서 전문가인 그들이 오히려 가난한 과부를 돌아보라는 율법을 무시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 두 렙돈으로 생활하는 아주 가난한 과부가 있다는 사실은 서기관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결과였고, 서기관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과부의 가산을 빼앗는 착취를 일삼는 결과임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참된 이웃 사랑이 사라져버린 이스라엘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는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을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믿는 우리가 선민의식에 빠져 주님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내 모습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은 참된 예수님의 사랑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이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기에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과부와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주님의 제자인 내가, 선택받은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자신의 안위와 예배당만 아름답게 치장하는 일에 골몰하여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성도와 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맞이하여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며 내 스스로가 예수의 제자도를 다하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회 건축과 재정을 늘리기 위해 온갖 세상의 축복과 헌금을 강조합니다.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고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고 싶은 목회적 야망으로 온갖 기복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라 약속하며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 곳은 심판의 대상인 강도의 소굴일 뿐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전 재산을 탈탈 터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당신은 과연 삶의 만족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심을 주님 때문에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기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에 외식하는 신앙이 아닌지, 내 현 신앙의 상태를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나 소그룹 안에서는 신실하고 건강하며 밝은 모습이지만, 내면은 병든 상태로 있지 않은 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마음 때문에 본심을 숨기고 기도제목을 숨기고 있지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나’라는 존재가 자리잡고 있어 교만하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의지하고, 더 의식하고, 그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살아가는 한결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명기 15장 11절“땅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다”는 말씀처럼 어떤 공동체든 그 안에는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죠.
주님께서 새로 세우신 성전인 교회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과부나 고아 같은 사회적 약자는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을 가난한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과부, 가난한 고아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섬김으로, 서로를 부요하게 하는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모든 물질과 건강은 당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라 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과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의 참 의미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영광과 부귀와 존귀를 버리시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난하게 되신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고후8:9)를 본받아 나의 부요한 것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쁨과 자원함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자격 없는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지만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시고 늘 새롭게 하옵소서. 사람을 의식하고 살아가지 않게 하시고 진실함으로 주님의 의를 이루게 하옵소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시고, 일상의 작은 일들에서부터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길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불신앙과 외식에 물든 가식된 모습으로 만들어진 한국교회의 허영과 오만함을 고백하오니 주님의 긍휼하신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바로 알아 우리의 삶의 지표가 주님의 말씀으로 삼게 하시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에 전부되신 주님을 높이며 예물 드리오니 받으시고 주님께 온전하게 헌신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게 하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혜가 주님의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며 살기로 다짐하는 성도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