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나서 1장 1~3절 아직 남겨 놓으신 기회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5. 3. 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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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11~3아직 남겨놓으신 기회 

 (메디윌병원 2016. 07 24)

 

바벨론 포로기 이전의 선지서들의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돌이키라’‘회개하라메세지입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회개와 돌이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아버지 아밋대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이름의 뜻은 깨달음이고 요나 또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왕하 1425절이하) 이름 뜻은비둘기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므로,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 심지어 동물들까지 회개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선포가 있은 지 50년 후 722년에 앗수르(현 이라크)는 북 이스라엘을 포로로 사로잡아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론 말이 안 됩니다.

50년 후에 택한 선민 이스라엘을 포로로 사로잡아갈 나라에 대해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명령 아닙니까?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나요?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에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대로 돌아서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 하나님 없이 살았던 이방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돌이켰습니다.

회개하고 금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의식에 빠져 돌아서지도, 돌이키지 않았다.

너희가 결국 멸망하고 포로가 된 이유는 니느웨처럼 회개치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십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선포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요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모호함도 없고, 애매함도 없습니다.

말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기능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써 인격을 드러내기도 하고, 말의 영향력으로 책임을 지게 하며, 생명력이 있어 오랜 시간 후에도 짧은 말 한마디가 희망을, 또는 절망을 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의 한마디는 우리를 한없이 행복하게도 하고 한없는 불행으로 삶 전체를 방황의 늪으로 몰아 놓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말은 곧 그 사람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도시 니느웨 성으로 가서(원어: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십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북동쪽으로 500마일(8,000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당시경쟁자가 없는 왕궁이라 칭했던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성의 둘레는 13이며 성벽은 내벽과 외벽으로 된 이중성벽으로 높이는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성으로 당시 인구가 12만명이 살던 곳입니다.

성벽의 폭은 세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넓이로 견고한 난공불락 요새였습니다.

 

구약성경 나훔서를 보면

니느웨는 악독한 성읍 죄악이 가득한 악의 상징의 도시였습니다.

니느웨 성읍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음모가 있던 곳입니다

무기력한 자를 갈취하는 곳으로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곳입니다.

여러 가지 잡신의 우상숭배, 매춘, 마술이 만연하던 곳이 니느웨 였습니다.

이웃 국가들의 피를 흘리는 악행을 자행하던 나라가 바로 앗수르였습니다.

이런 죄악의 소굴임을 알고 있었기에 요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본문은 죄악이 너무 커 하나님께 예전에 이미 도달해 있는 완료형 의미지만,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계속적으로 예전부터 지금까지 죄가 도달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 의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계속적으로 죄악이 자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임을 알고 있던터라 겁을 내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무엇이 요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습니까? 그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침에 스마트폰 웹에 실린 뉴스기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말씀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 무엇인가 도무지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어떤 것에 의해 흔들리게 됩니다.

 

3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 그것을 거부하고 달아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다는 이 사실이 충격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낯익은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충격적인 것은 요나는 불신자도 아니고, 초신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하나님을 불순종해도 선지자는 목숨을 내놓고라도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요, 또 기대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렇게 확실한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가버립니다.

이는 자신의 편협한 이기주의와 국수주의에 눈멀어 니느웨에 대한 구원을 불평하였습니다.

사실, 이 장면 이후에 요나서에서 펼쳐지는 모든 장면은 요나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바람도, 바다 속의 큰 물고기도, 불신과 죄악에 속하던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도, 심지어는 동물까지도 굵은 베 옷을 입고 순종합니다.

박 넝쿨도 순종하고, 박 넝쿨을 갉아먹은 벌레도 순종합니다.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요나서에 등장하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오직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만 불순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백성이 되었는데 요나처럼 불순종의 입장은 아닌가요?

이기주의와 자신의 그릇된 심사에 뒤틀려 불평하지는 않나요?

 

요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갑자기 자신의 사재를 정리해서 돈을 모읍니다.

정신빠진 사람처럼 허둥대는 모습으로 대충 짐을 꾸려 항구에 나왔고, 가고자 하는 방향도 결정하지 않고 제일 먼저 만난 배를 타고 지금의 스페인 다시스 땅으로 향합니다.

니느웨와는 전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거리도 니느웨보다 5(2500마일 약 4)나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세상의 끝자락이라고 생각을 했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나는 세상의 끝으로 도망을 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였다2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과연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다시스로 도망가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선지자입니다. 여호와를 피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시편 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이 다윗의 고백 또한 알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피할 길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요나가 도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주께서 부여하신 임무를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충분히 요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게 원수입니다.

옆구리의 가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의 악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그들의 사악함을 다 알고 있는 요나입니다.

멸망되어야 할 니느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니느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멸망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요나의 생각과 요나의 판단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상처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가라십니다.

나와 지금 감정의 앙금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손을 내밀라십니다.

지금 나에게 해를 끼치고, 손해를 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소리치어 외치라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요나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니느웨에 가서 선포하라.

 

여기 또 하나 3절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바로 내려갔더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가는 요나의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 대신 자신의 길을 택할 때 그것은 반드시 내려가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멀어지는 길은 항상 내려가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위로 갈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길은 처음에는 좋아 보이고 평탄해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순조롭게 목적하는 바를 이룰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끝인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욥바는 수심이 깊지 않은 작은 항구로 대형선박이 정박하기 어려웠고 당시 다시스는 매우 먼 거리여서 왕래하는 배가 드물었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 기막힌 타이밍에 배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많이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는 경험입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전, 그 일에 대해 나름대로 묵상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기막힌 타이밍입니다. 그래서 아 그래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결정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지 않습니다.

지금 요나에게도 기막힌 타이밍에 다시스로 가는 배를 욥바로 내려가자 마자 만나지 않나요?

그러면 그렇지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니느웨에 가서 소리치라는 내용이 잘못되었던 거야, 그러니까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욥바에 도착하자 마자 만나게 된 거야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요나의 착각이고, 우리의 착각입니다.

자꾸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합당한 답을 우리가 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마침 배를 만난 것은 결코 행운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에 동조하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닙니다.

욥바로 가는 배는 요나를 편안한 안식의 장소로 이끌 유람선이 아니라 죄인 요나를 바다 속으로 집어 던지기 위해 사용된 호송선입니다.

그러면 이런 실수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배하는 자리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듣는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당신의 삶이 예배의 자리이며, 당신이 말씀을 읽는 자리이고, 기도를 하는 그 자리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요나의 자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얼굴을 맞대는 자리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막힌 타이밍에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잘못된 판단이고, 생각일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 배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배가 아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나는 정말 전하고 싶지 않는 말씀을 니느웨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비둘기와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싫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가지만, 도망 가 봐야 물고기 배 속입니다.

그곳에서 삼일 밤낮을 괴로워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그렇게 싫어하는 니느웨 사람에게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한 요나의 행로는 욥바로, 배로(2), 배 밑층으로(5), 바다 속으로(15), 마침내 물고기 뱃속까지(17) 내려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자는 깊은 음부까지 내려가게 됨을 기억합시다.

죽은 자들이나 가는 곳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더니 결국엔 죽은 자들이 가는 곳 문턱까지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설교를 통해, 묵상을 통해 그 뜻을 알려주심에도 두려움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것을 피해 도망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지나친 것을 요구하신다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도망가면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뿐입니다.

납득이 되지 않아도, 결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도 그 분께 순종하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이 가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낯을 향해서입니까?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입니까?

하나님의 낯을 뵐 수 있는 곳입니까, 아니면 정반대 방향입니까?

주님이 임재하여 기다리시는 곳입니까, 아니면 그 분이 안 계시기를 기대하는 내 사욕의 자리입니까?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곳입니까?

욥바입니까, 니느웨입니까


우리도 요나처럼 세상을 향해서 주의 메시지를 선포하라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입술로 전해야 하고 때로는 그들과 구별된 삶을 통해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뜻에 어긋나더라도 하나님 뜻에 내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새로 정립하여 아직 남겨놓으신 기회를 다시 찾는 성도들이 되기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이제까지 하나님께 받은 바를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무관심하게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의 소식을 전하지도 못하고 본을 보이지도 못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아직 남겨놓으신 기회를 찾아 세상에 나가 주의 자녀로 향기를 나타내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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